자료 모음/동파역전

[동파역전] 14. 대유괘(大有卦, ䷌)

베트남10선비 2023. 3. 2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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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有, 元亨. 彖曰, “大有, 柔得尊位, 大中而上下應之, 曰大有.

謂五也, 大者皆見有於五, 故曰大有.

오효를 말한 것이다. 큰 자들(을 의미)이 모두 오효에서 만나고 있으므로 대유라고 말하는 것이다.

其德, 剛健而文明. 應乎天而時行, 是以元亨象曰, “火在天上大有. 君子以遏惡揚善, 順天休命.”

以健濟明, 可以進退善惡, 順天之休命也.

굳건함으로써 밝음을 이루어 선을 나아가게 하고 악을 물리칠 수 있으니,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다.

初九, 無交害, 匪咎. 艱則無咎.

二應於五, 三通於天子, 四與上近焉, 獨立無交者, 惟初而已. 雖然無交之爲害也, 非所謂咎也. 獨立無恃而知難焉, 何咎之有?

이효는 오효에 응하고, 삼효는 천자에 통하며, 사효는 위와 가까우니 홀로 서서 교통함이 없는 것은 오직 초효뿐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교통하는 것이 없어서 해가 되는 것은 허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니다. 홀로 서서 믿고 의지할 것이 없으므로 어려움을 아는데, 어떤 허물이 있겠는가?

象曰, “大有初九, 無交害也.”

明惟初九爲然也.

오직 초구효만이 그렇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九二, 大車以載, 有攸往, 無咎. 象曰, “大車以載, 積中不敗也.”

大車虛而有容者, 謂五也. 九二, 足以有爲矣, 然非六五虛而容之, 雖欲往可得乎? 積中, 明虛也.

큰 수레인데 비어서 포용함이 있는 자는 오효를 가리킨다. 구이효는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육오효가 비어서 (이효를) 포용하지 않는다면 비록 가고자 하여도 갈 수 있겠는가? 가운데 쌓는다는 것은 그것이 비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九三, 公用亨於天子, 小人弗克. 象曰, “公用亨於天子, 小人害也.”

九三, 以陽居陽, 其勢足以通於天子. 以小人處之, 則敗矣.

구삼효는 양효로서 양의 자리에 머무니, 그 형세는 충분히 천자와 통할 수 있다. 소인이 여기에 처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九四, 匪其彭, 無咎. 象曰, “匪其彭, 無咎, 明辯晢也.”

, 三也. 九四之義, 知有五而已. 夫九三之剛, 非強也, 六五之柔, 非弱也. 惟明者, 爲能辨此.

성대한 것은 삼효이다. 구사효의 의로움은 오효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무릇 구삼효의 강건함은 강함이 아니며, 육오효의 부드러움은 약한 것이 아니다. 오직 밝은 자라야 능히 이것을 분별할 수 있다.

六五, 厥孚交如, 威如吉. 象曰, “厥孚交如, 信以發誌也. 威如之吉, 易而無備也.”

處群剛之間而獨用柔, 無備之甚者也. 以其無備, 而物信之. 故歸之者交如也. 此柔而能威者, 何也? 以其無備, 知其有余也. 夫備生於不足, 不足之形見於外, 則威削.

여러 강건한 것들 사이에 처하여 홀로 부드러움을 쓰니, 갖춘 것이 매우 없는 자이다. 갖춘 것이 없으므로 외물이 이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거기에 귀의하는 자가 교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왜인가? 갖춘 것이 없음을 통해서 여유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무릇 갖춘다는 것은 부족함에서 생기니, 부족함이 밖으로 드러나면 위엄이 깎인다.

上九, 自天祐之, 吉無不利. 象曰, “大有上吉, 自天祐也.”

曰祐, 曰吉, 曰無不利, 其爲福也多矣, 而終不言其所以致福之由. 而象又因其成文, 無所復說, 此豈真無說也哉? 蓋其所以致福者, 遠矣. 夫兩剛不能相用, 而獨陰不可以用陽, 故必居至寡之地, 以陰附陽而後, 衆予之. 履之六三, 大有之六五, 是也. 六三附於九五, 六五附於上九, 而群陽歸之. 二陰既因群陽而有功. 九五上九, 又得以坐受二陰之成績. 故履有不疚之光, 而大有有 自天之祐. 此皆聖賢之高致妙用也. 故孔子曰, “天之所助者, 順也; 人之所助者, 信也. 履信思乎順, 又以尚賢也, 是以自天祐之, 吉無不利.” 信也, 順也, 尙賢也. 此三者, 皆六五之德也. 易而無備, 六五之順也, 厥孚交如, 六五之信也, 群陽歸之, 六五之尚賢也. 上九特履之爾, 我之所履者, 能順且信又以尙賢, 則天人之助, 將安歸哉? 故曰聖人無功, 神人無名.’ 而大有上九, 不見致福之由也.

돕는다고 말하고, ‘길하다고 말하며,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말했으니 그 복됨이 매우 많음에도 그 복을 부르는 까닭에 대해서는 끝내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상전에서도 다시 글을 지어 설명한 바가 없는데, 이것이 어찌 참으로 말할 것이 없어서겠는가? 대체로 그 복을 부르는 까닭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무릇 두 이 서로를 활용할 수 없고, 홀로 있는 한 을 활용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지극히 약한 지위에 처하여 음으로ㅆ 양에 붙은 뒤에야 무리가 그와 함께하는 것이다. 괘의 육삼효와 大有괘의 육오효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리괘의 육삼효는 구오효에 붙고, 대유괘의 육오효는 상구효에 붙어야 여러 양들이 거기에 귀의한다. 이 두 음은 여러 양으로 말미암아 공적이 있다. 리괘의 구오효와 대유괘의 상구효는 앉아서 두 음의 공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리괘에는 병폐가 없는 빛남이 있고 대유괘에는 하늘로부터의 도움이 있다. 이것은 모두 성현의 높이 다다른 오묘한 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하늘의 도움을 받는 자는 순응하기 때문이고, 사람의 도움을 받는 자는 미더움이 있기 때문이다. 미더움을 행하고 순응할 것을 생각하며, 다시 현명한 자를 숭상한다. 이런 까닭에 하늘이 도와 길하고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믿는 것, 순응하는 것, 현자를 숭상하는 것 이 3가지는 모두 육오효의 이다. 쉬워서 갖출 것이 없음은 육오효의 순응함 때문이고, 그 진실로 교류하고 따름은 육오효의 미더움 때문이며, 여러 양이 거기에 귀의하는 것은 육오효가 현자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상구효는 단지 이것을 밟고 있을 뿐이다. 내가 밟고 있는 자가 순응하고 믿으며, 이로써 현자를 숭상한다면 하늘과 사람의 도움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공이 없고, 신인은 이름이 없다고 말한 것이니, 대유괘의 상구효에서 복을 부르는 까닭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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