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人於野, 亨. 利涉大川, 利君子貞. 彖曰, “同人, 柔得位得中而應乎乾, 曰同人.
此專言二也.
이것은 오로지 이효를 말한 것이다.
同人曰‘同人於野亨
此言五也, 故別之.
이것은 오효를 말하기 때문에 구별한 것이다.
* 同人曰을 《주역전의》에서는 연문으로 보았음.
利涉大川,’ 乾行也.
野者, 無求之地也. 立於無求之地, 則凡從我者, 皆誠同也. 彼非誠同, 而能從我於野哉? 同人而不得其誠同, 可謂同人乎? 故天與人同, 物之能同於天者, 蓋寡矣. 天非求同於物, 非求不同於物也. 立乎上, 而天下之能同者自至焉, 其不能者不至也. 至者, 非我援之; 不至者, 非我拒之. 不拒不援, 是以得其誠同, 而可以涉川也. 故曰“同人於野, 亨. 利涉大川, 乾行也.” 茍不得其誠同, 與之居安則合, 與之涉川則潰矣. 涉川而不潰者, 誠同也.
들판이라는 것은 구할 것이 없는 땅이다. 구할 것이 없는 땅에 서 있다면, 무릇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진실로 함께 하는 것이다. 저들이 진실로 함께하는 것이 아닌데 능히 들판에서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서도 진실로 함께함을 얻지 못하면 ‘동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은 함꼐하지만, 하늘과 능히 하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물은 대체로 적다. 하늘은 사물에 함께할 것을 구하지도 않고, 함께하지 않을 것을 구하지도 않는다. 위에 서 있기만 하면 천하에 능히 함께할 수 있는 자들이 스스로 올 것이고, 동화할 수 없는 자는 오지 않는다. 온 자도 내가 끌어당긴 것이 아니고, 오지 않은 자도 내가 거부한 것이 아니다. 거부하지도 않고 끌어당기지도 않았으므로 진실로 함께함을 얻어 大川을 건널 수 있다. 그러므로 “들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니, 형통하다. 대천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건이 실행한 것이다”고 말한 것이다. 진실로 함께함을 얻지 못하면, 그와 더불어 안주하는 것은 합당하나, 그와 더불어 대천을 건넌다면 흩어져버릴 것이다. 대천을 건너도 흩어져버리지 않는 것은 진실로 함께하기 때문이다.
文明以健, 中正而應, 君子正也. 唯君子, 爲能通天下之誌.” 象曰, “天與火同人. 君子以類族辨物.”
水之於地爲比, 火之與天爲同人. 同人與比, 相近而不同, 不可不察也. 比以無所不比爲比, 而同人以有所不同爲同. 故‘君子以類族辨物.’
물이 땅에 있는 것을 比라고 하고, 불이 하늘과 함께하는 것을 同人이라고 한다. 동인과 비는 서로 비슷하나 같지 않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비는 비슷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돕게 되고, 동인은 같지 않은 바가 있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이것을 보고 무리를 나누어 사물을 분별한다’는 것이다.
初九, 同人于門, 無咎. 象曰, “出門同人, 又誰咎也?”
初九, 自內出, 同於上; 上九, 自外入, 同於下. 自內出, 故言門; 自外入, 故言郊. 能出其門, 而同於人, 不自用者也.
초구효는 안에서 나와 위에서 함께하며, 상구효는 밖에서 들어와 아래에서 함께한다. 안에서 나가기 때문에 ‘문’이라 말하고, 밖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교외’라고 말한다. 능히 그 문을 나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자는 자기 생각대로 하는 자가 아니다.
六二, 同人于宗, 吝. 象曰, “同人于宗, 吝, 道也.”
凡言媾者, 其外應也, 凡言宗者, 其同體也. 九五爲媾, 九三爲宗, 從媾正也, 從宗不正也. 六二之所欲從者媾也, 而宗欲得之. 正者, 遠而不相及; 不正者, 近而足以相困. 茍不能自力於難, 而安於易以同乎不正, 則吝矣.
무릇 ‘혼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밖에서 호응하는 것이고, ‘친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體를 같이 하는 것이다. 구오효는 혼인할 자이고 구삼효는 친족이므로, 혼인할 자를 따르는 것이 올바르고 친족을 따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육이효가 따르고자 하는 것은 혼인할 자인데, 친족을 따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육이효가 따르고자 하는 것은 혼인할 자인데, 친족이 이것을 얻고자 한다. 올바른 자는 멀어서 미치지 못하고, 올바르지 않은 자는 가까워서 서로를 괴롭히기에 충분하다. 만약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어서, 쉬운 데 안주하여 올바르지 못한 자와 함께한다면 부끄럽다.
九三, 伏戎於莽, 升其高陵, 三歲不興. 象曰, “伏戎於莽, 敵剛也. 三歲不興, 安行也.”
九四, 乘其墉. 弗克攻, 吉. 象曰, “乘其墉, 義弗克也. 其吉, 則困而反則也.”
六二之欲同乎五也, 歷三與四而後至, 故三與四皆欲得之. 四近於五,五乘其墉. 其勢至迫而不可動. 是以雖有爭二之心, 而未有起戎之迹. 故猶可知困而不攻, 反而獲吉也. 若三之於五也, 稍遠而肆焉. 五在其陵而不在其墉, 是以伏戎於莽而伺之, 既已起戎矣. 雖欲反則可得乎? 欲興不能, 欲歸不可, 至於三歲行將安入, 故曰‘三歲不興, 安行也.’
육이효가 오효와 함꼐하고자 하는데, 삼효와 사효를 거친 뒤에야 도달하기 때문에 삼효와 사효가 모두 이것을 가지려 한다. 사효는 오효에 가까워 오효가 그 성곽에 올라탄다. 그 세력이 지극히 위협적이어서 움직일 수 없다. 이 때문에 비록 이효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병기를 들고 일어나려는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가히 괴로울 것임을 알아서 공격하지 않고 되돌아가 길함을 얻는다. 예컨대, 삼효가 오효에 대해서는 약간 멀리 떨어졌기에 제멋대로 행동한다. 오효가 그 언덕에 있고, 그 성곽에는 있지 않기 때문에 숲에 병기를 숨긴 채 엿보는 것이니, 이미 병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비록 돌이키고자 하더라도 불가능하니, 3년이 지나서 실행하면 편하게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3년을 흥기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전하게 실행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九五, 同人先號咷而後笑. 大師克相遇. 象曰, “同人之先, 以中直也. 大師相遇, 言相克也.”
子曰, “君子之道, 或出或處, 或默或語.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由此觀之, 豈以用師而少五哉? 夫以三四之強而不能奪, 始於號啕而卒達於笑. 至於用師相克矣, 而不能散其同. 此所以知二五之誠同也. 二, 陰也. 五, 陽也. 陰陽不同而爲同人, 是以知其同之可必也. 君子出處語默不同而爲同人, 是以知其同之可必也. 茍可必也, 則雖有堅強之物, 莫能間之矣. 故曰‘其利斷金.’ 蘭之有臭, 誠有之也. 二五之同其心, 誠同也, 故曰‘其臭如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때로는 나가고 때로는 머물며,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말한다. 두 사람의 마음을 합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으며, 마음을 하나로 합한 말은 향기가 난초와 같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어찌 군대를 활용한다고 하여 오효를 깔보겠는가? 삼효와 사효의 강함으로도 빼앗을 수 없기에 시작은 목놓아 울지만 마침내 웃기에 이른다. 군대를 동원해 서로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그 함께함은 흩트릴 수 없다. 이로써 이효와 오효가 참으로 함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효는 음이고, 오효는 양이다. 음양이 같지는 않지만 ‘동인’이 되니 그 함께함은 가히 필연적임을 알 수 있다. 군자는 나가고 머물며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같지 않지만 사람들과 함꼐하니, 이 때문에 그 함께함이 가히 필연적임을 알 수 있다. 참으로 필연적이라면 아무리 견고하고 강한 물건이라도 이 사이를 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날카로움이 쇠를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난초가 향기나는 이유는 참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효와 오효가 그 마음을 함께하는 것은 참으로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上九, 同人於郊. 無悔. 象曰, “同人於郊, 誌未得也.”
物之同於乾者, 已寡矣. 今又處乾之上, 則同之者尤難. 以其無所苟同, 可以無悔, 以其莫與共立, 則志未得也.
건과 함께하는 사물은 매우 적은 법이다. (게다가) 지금 다시 건의 꼭대기에 처하니 이것과 함께하는 자가 더욱 어렵다. 구차하게 함께 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후회는 없을 수 있지만, 더불어 함께 설 것이 없으니 뜻을 얻지는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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