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한국 vs 베트남 친선전 본 이야기

오늘 마침 가족들이 전부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어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서 축구를 보았다.
 

3-0 시점에 갑자기 사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 찍었다

 
우리 띠엔은 박항서 감독님 재직 시절 조금 본 게 전부여서,
이번에 나온 선수들을 보며 대부분 처음 본다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띠엔과 결혼하기 전까지 베트남에 큰 관심이 없던 아버지는
전반 초반에 베트남 선수들이 두 줄 압박 수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수비는 잘 하네' 하셨다가
한국의 득점 숫자가 점점 올라가면서 말수가 줄어드셨다.
 
1. 개인적으로 당 반 럼(Đặng Văn Lâm)이 아직도 대표팀 골리를 서야 하는 이유는 충분히 보여줬다고 본다. 너무 월드 클래스 골리들의 플레이만 봐서 성에 안 차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대표팀 골리의 세대 교체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에도 당 반 럼이 보여주는 중요한 시점의 선방 능력은 대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
 
2. 현재 대표팀은 일부 선수를 제외하고는 A매치 출장 기록이 0경기, 1경기인 선수들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사실 이번 선수단 명단을 보면서 베트남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강팀을 대비한 압박과 역습 전환? 이런 걸 기대했는데 오히려 압박과 전환은 한국이 하고 있고... 당장 11월에 월드컵 지역예선을 필리핀, 이라크와 치르는데... 그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고 보기에는 이번 경기에서 한 게 너무 없었다. 한국이 방심을 해서 기회를 내준 게 많았는데도 무슨 생각인 건지 애매한 킥으로 날린 게 대부분이라.
 
3. 내가 베트남 축구를 그렇게 오래 본 건 아니지만, 대략 2018년도부터 봐온 결과로는 박항서 감독님의 축구는 전술에 무게추가 실리기보다는, 정신력과 동기부여에 무게추가 실린 느낌이었다. 전술에서 어떤 플레이를 요구한 모습이 보이긴 했는데, 선수들의 플레이가 (굉장히 많이) 삐걱거려서 안 굴러가는 느낌이 초창기부터 퇴임 전까지 계속 보였다.
 
4. 선수들에게 정신적인 무장을 위한 강한 압력 + 동기 부여 + 성과 + 성취감이 몇 년 동안 절묘하게 조화되어서, 중요한 순간에 열세를 보이더라도 '이거 이기겠는데'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축구의 신이 베트남 대표팀을 보살피고 있었다.
 
5. 중요한 경기, 중요한 순간에서 얻어낸 성과들이 남긴 강렬한 기억 덕분에 베트남이 동남아 넘버원인 것처럼 굴고 있지만, 실상 박항서 감독님의 태국전 전적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니다. 그리고 태국을 제외하면 동남아가 전반적으로 열세였기에 별 의미가 없고.
 
6. 뽕 맞은 것마냥 정신이 고무되어서 성과를 올리던 베트남 대표팀도, 박항서 감독님 재임 후반기로 가면 점점 약빨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본인들이 언더독이라는 걸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전술적 움직임을 수행했다면 점점 '강팀의 멋진 축구'를 하고 싶은 모습이 보인다고 할까? 선수들의 움직임에서 보이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특히 자기가 뻘짓을 해놓고 지가 화를 내는 이상한 장면들이 속속 연출되기 시작했다. 마치 박 감독님 부임 초창기에 보였던 모습마냥.
 
7. 이미 선수들도 만족을 했는지, 자기 브랜드 런칭하면서 런을 친 선수들부터 광고모델에 여자친구에... 축구 기사보다 일반 기사에 얼굴을 비치는 선수들이 훨씬 많아지기 시작했었다.
 
8. 그래서 박항서 감독님의 탈출 시기가 정말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시아 전체로 놓고 봤을 때 성과가 없다'는 식의 비판에 직면하기 시작한지 오래이기도 했고, 박항서 감독님 아래에서 한창 좋은 모습을 보였던 선수들이 해외 나가서 성장은 고사하고 폼이 다 죽어 버리기 시작하기도 했고. 마지막 경기였던 AFF컵 태국전을 보니 이미 정신력에 채찍질하고 결과로 동기부여 하는 건 약빨이 다 죽은 게 보였다.
 
9. 트루시에 감독이 강팀과 하는 중요한 평가전,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하는 평가전에서 의미 있는 전술이나 방향성을 보여주지 못한 건 좀 아쉽다. 그 방향성 하나로 월드컵 예선이나, 아시안컵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 스노우볼이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은 선수 구성이기는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