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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정보] '부이 비엔 여행자 거리'에서 부이 비엔이 대체 뭐야?

베트남10선비 2023. 5. 1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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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시를 여행하는 젊은 여행자들이 단연코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이곳, '부이 비엔(Bùi Viện)' 거리가 아닐까.

 

하도 '부이 비엔', '부이 비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이름은 친숙한데

이 이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베트남의 도로명칭은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아니면 역사적 사건(특히, 공산주의 혁명사 관점에서),

그도 아니면 그냥 알파벳과 숫자 나열(A1,A2...) 혹은 단순히 국도(QL), 지방도(ĐT) 등의 이름이 붙는다.

 

길을 다니면서 보이는 도로명들 중에는 굉장히 친숙한 이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부이 비엔은 많이 거론되는 이름치고는 확실히 덜 친숙한 이름이 아닐까.

 


한국의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인이라면 국사를 공부하면서 한 번 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보빙사'이다.

내가 찾지 못한 기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미국에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바로 보빙사에 속해있던 구성원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조약 2조에 따라 양 조약국은 전권공사를 상대국에 파견해야 했다. 1883년 5월 미국의 전권공사 푸트가 서울에 부임하였으나, 조선의 여건 상 워싱턴에 전권공사를 파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공사파견의 대안으로 조선보빙사 견미사절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출처 : 나무위키

나무위키 사진의 색감이 더 마음에 들어서 이쪽에서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수업 시간 혹은 유튜브 등을 통해 본 적이 있을 법한 미국대통령에게 큰절을 하는 조선사절들 삽화는

사실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굳이 여기에 가져오지는 않겠다.

수행원이나 통역 등등을 제외하고, 공식 사절만을 최초로 미국에 방문한 한국인이라고 본다면

전권대신 민영익, 전권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을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부이 비엔 이야기를 꺼내놓고, 왜 갑자기 한국 역사의 조선보빙사 이야기를 줄줄 읊고 있을까?

눈치가 빠르신 분들도 있고,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베트남 역사에서는 '부이 비엔(Bùi Viện)'이 베트남 역사에서 최초로 미국 땅을 밟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진 속 인물이 Bùi Viện이다

부이 비엔이 활약하던 시대는 뜨 득(Tự Đức) 황제의 시대로, 유럽 열강 특히 프랑스와 마찰을 자주 빚던 시기였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여러 문제가 있었던 시기였고,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가 사정을 살펴보고,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을 찾고자 했다.

 

부이 비엔 역시 왕의 명에 따라서 해외로 나아가 해외 사정을 공부하고 돌아오기로 하였다.

당시 홍콩이 영국에게 할양되면서, 영국과 미국이 활발하게 이 지역을 오게 되었다.

이에 부이 비엔은 홍콩을 통해 미국 그리고 미국인을 접하면서 이 나라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왕에게 보고하고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중국을 거쳐 일본 요코하마에 짧게 머문 다음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게 된다. 때는 1873년이었다.

부이 비엔은 약 1년을 미국에 체류한 끝에 당시 미국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를 만났다고 한다.

미국은 멕시코에서 프랑스와 분쟁을 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베트남을 지원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괴롭힐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부이 비엔은 왕의 명으로 나오긴 했으나 공식 사절단이 아니어어 국서가 없었다.

 

귀국을 한 부이 비엔이 왕에게 보고를 하고, 국서를 받아 1875년 다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미국이 프랑스와의 적대 관계를 해소했기 때문에 프랑스를 견제할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미국은 기존에 받았던 베트남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빈손으로 귀국을 했다.

소득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잃은 것도 생겼다.

귀국과 동시에 들었던 것은 어머님의 부고 소식이었다.

 

참고로, 부이 비엔이 첫 번째 미국 방문에서 미국의 대통령을 만났다는 기록은 미국 측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서 교차 검증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돌아 온 이후, 부이 비엔은 뜨 득 황제의 명을 받아 해군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해군 역량에서 열강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베트남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1876년부터 시작된 그의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1878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1878년 11월, 39세의 나이로 돌연사했기 때문이다.

 

굉장히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베트남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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