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모음/동파역전

[동파역전] 2. 곤괘(坤卦, ䷁)

베트남10선비 2023. 3. 7.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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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역전] 1. 건괘(乾卦, ䷀)

네이버 블로그에서 가끔씩 불연듯 떠오를 때마다 정리하고 있는 내용들을 이쪽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는 내릴 예정. 일단 저본은 아래의 책이다. 동파역전 (소동파의 주역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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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괘 중 첫 번째 괘, '건괘' 파트는 바로 위의 링크로.


坤, 元亨, 利牝馬之貞.

龍, 變化而自用者也. 馬, 馴服而用於人者也. 爲人用而又牝焉, 順之至也. 至順而不貞, 則陷於邪. 故‘利牝馬之貞’.

용은 변화하면서 스스로 활동하는 자이다. 말은 길을 들이고 복종하게 하여 사람에게 쓰이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쓰이고 또한 암컷이니 순응함이 지극한 것이다. 지극히 순응하지만 올바르지 못하면 사악함에 빠진다. 그러므로 ‘암말이 곧아야 이롭다’고 말한다.

君子有攸往, 先迷後得主利. 西南得朋, 東北喪朋. 安貞吉. 彖曰; “至哉, 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坤厚載物. 德合無疆, 含弘光大, 品物咸亨. 牝馬地類, 行地無疆. 柔順利貞, 君子攸行. 先 迷失道, 後順得常. ‘西南得朋’, 乃與類行, ‘東北喪朋’, 乃終有慶. 安貞之吉, 應地無疆”.

坤之爲道, 可以爲人用而不可以自用, 可以爲和而不可以爲倡, 故君子利有攸往. 往, 求用也. 先則迷而失道, 後則順而得主. 此所以爲利也. 西與南則兌也, 離也, 以及於巽, 吾朋也. 東與北則震也, 坎也, 以及於乾與艮, 非吾朋也. 兩陰不能相用, 故必離類絶朋而求主於東北. 夫所以離朋而求主者, 非爲邪也. 故曰‘安貞吉’.

坤道는 남을 위해 쓰일 수는 있지만 스스로를 위해 활동할 수는 없으며, 뒤따르며 조화할 수는 있지만 앞서서 선창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군자는 갈 곳이 있는 것이 이로운 것이다. 往이란 쓰임을 구한다는 말이다. 앞장서면 미혹되어 도를 잃게 되고, 뒤따르면 순응하여 주군을 얻는다. 이것이 이롭게 되는 이유이다. 서쪽과 남쪽은 兌와 離에서 巽에 이르기까지 나(坤)의 친구이다. 동쪽과 북쪽은 震과 坎에서 乾과 艮에 이르기까지 나의 친구가 아니다. (곤괘의) 두 음효는 서로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무리를 떠나고 친구관계를 끊으면서 동북쪽에서 주군을 구하는 것이다. 친구를 떠나서 주군을 구하는 이유는 사악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올바름에 안주하면 길하다’고 말한다.

象曰. “地勢坤. 君子以厚德載物.”

坤未必無君德, 其所居之勢, 宜爲臣者也. 書曰, “臣爲上爲德, 爲下爲民.”

坤道에 반드시 君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곤괘가 머물고 있는 형세는 신하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書經』에 말했다. “신하가 백성 위에 있는 것은 德이 있기 때문이고, 내 아래 있는 것은 백성에게 덕을 베풀기 위해서이다.”

初六, 履霜, 堅冰至. 象曰. “履霜堅冰,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冰也.”

始於微而終於著者, 陰陽均也. 而獨於此戒之者, 陰之爲物, 弱而易入, 故易以陷入. 鄭子産曰, “水弱民狎而翫之, 故多死.”

미약하게 시작하여 두드러지게 마치는 것은 음과 양이 모두 같다. 그런데도 여기서 홀로 경계하는 까닭은 陰의 성격이 약하여 들어가기 쉬워서 사람이 빠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鄭子産이 말했다. “물은 연약한 것이어서 백성들이 가까이하며 얕잡아 보기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다.”

六二, 直方大. 不習, 无不利. 象曰. “六二之動, 直以方也. ‘不習無不利’, 地道光也.”

以六居二, 可謂柔矣. 夫直方大者, 何從而得之? 曰六二順之至也. 君子之順, 豈有他哉? 循理無私而已. 故其動爲直, 居中而推其直爲方, 旣直且方, 非大而何? 夫順生直, 直生方, 方生大, 君子非有意爲之也. 循理無私而三者自生焉, 故曰‘不習無不利’. 夫有所習而利, 則利止於所習者矣.

음효(六)가 두 번째(二) 자리에 머무니, 부드럽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곧고 방정하고 크다’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얻은 것인가? 육이효의 순응함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군자의 순응함이 어찌 다른 곳에 있겠는가? 이치를 따르고 사사로움이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움직임은 곧게 되고, 中에 머물면서 그 곧음을 밀고 나가기 때문에 방정하게 되며, 이미 곧고(直) 또 방정하다면(方) 큰 것(大)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릇 순응함이 곧음을 낳고, 곧음이 방정함을 낳으며, 방정함이 큰 것을 낳은 것은 군자가 의도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치를 따르고 사사로움이 없으면 세 가지(直, 方, 大)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익히지 않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다. 무릇 익힌 것이 있어서 이롭다면, 그 이로움이 익힌 것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六三, 含章可貞. 或從王事, 無成有終. 象曰. “含章可貞, 以時發也. 或從王事, 知光大也.”

三有陽德, 苟用其陽, 則非所以爲坤也. 故有章而含之. 坤之患, 弱而不可以正也, 有章則可以爲正矣. 然以可正而遂專之, 則亦非所以爲坤也. 故從事而不造事, 無成而代有終.

삼효에는 陽의 德이 있는데, 만약 그 陽(양기)을 사용한다면 坤卦가 될 수 없다. 때문에 밝음이 있지만 그것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坤은 약해서 올바를 수 없을까를 근심하는데, 밝음(章)이 있다면 올바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를 수 있다고 해서 이에 전념하기만 한다면 또한 곤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에 따르기는 하되 일을 만들어 나가지는 않고, 이루어내는 것은 없지만 그것을 대신해서 끝마침은 있다.

六四, 括囊, 無咎無譽. 象曰. “括囊无咎, 愼不害也.”

夫處上下之交者, 皆非安地也. 乾安於上, 以未至於上爲危. 故九三有夕惕之憂. 坤安於下, 以始至於上爲難. 故六四有括囊之愼. 陰之進而至於三, 猶可貞也, 至於四則殆矣. 故自括結以求無咎無譽. 咎與譽, 人之所不能免也. 出乎咎必入乎譽, 脫乎譽必羅乎咎. 咎所以致罪而譽所以致疑也. 甚矣, 無咎無譽之難也.

무릇 上卦와 下卦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爻는 모두 편안한 자리가 아니다. 乾卦는 위에 있는 것이 편안한 까닭에 위에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는 위태롭다. 그래서 (건괘의) 구삼효는 저녁에 두려워하는 근심이 있는 것이다. 坤卦는 아래에 있는 것이 편안한 까닭에 위로 다가가기 시작하면 어려워한다. 그래서 육사효에 주머니를 동여매는 신중함이 있는 것이다. 陰이 나아가 삼효에 이르렀을 때는 아직까지 올바를 수 있지만 사효에 다다르면 위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동여매어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기를 구하는 것이다. 허물과 명예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허물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명예에 들어가고, 명예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허물의 그물에 걸린다. 허물은 죄를 초래하는 원인이고, 명예는 의심을 초래하는 원인이다.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六五, 黃裳, 元吉. 象曰. “黃裳元吉, 文在中也.”

黃, 中之色也. 裳, 下之飾也. 黃而非裳則君也, 裳而非黃則臣爾, 非賢臣也. 六五陰之盛而有陽德焉. 故稱裳以明其臣, 稱黃以明其德. 夫文生於相錯. 若陰陽之事一, 豈有文哉? 六五以陰而有陽德, 故曰 ‘文在中也’.

황색은 중앙의 색이다. 치마는 아래를 장식하는 것이다. 황색인데 치마가 아니라면 군왕이며, 치마인데 황색이 아니라면 신하인데 현명한 신하는 아니다. 육오효는 陰氣가 왕성하면서도 陽의 德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치마를 언급하여 그것이 신하임을 밝혔고, 황색을 언급하여 德이 있음을 밝혔다. 무릇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서로 섞이는 데서 생겨난다. 만약 음양의 기운 중 한쪽만이 專一하다면 어찌 아름다운 꾸밈이 있겠는가? 육오효는 음효이면서 양의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꾸밈이 中에 있다’고 말한다.

上六, 龍戰于野, 其血玄黃. 象曰. “龍戰于野, 其道窮也.”

至於此, 則非陰之所能安矣. 陰雖欲不戰而不可得, 故曰 ‘其道窮也’.

여기에 이르렀다면 陰이 편안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음이 비록 싸우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으므로 ‘그 도가 궁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用六, 利永貞. 象曰. “用六永貞, 以大終也.”

易以大小言陰陽, 坤之順進以小也, 其貞終以大也.

《주역》은 大小를 가지고 陰陽을 말한다. 곤괘가 수능하는 것은 작게(陰) 나아가기 때문이고, 곤괘가 곧은 것은 크게(陽) 끝마치기 때문이다.

文言曰. “坤至柔而動也剛.

夫物非剛者能剛, 惟柔者能剛耳. 畜而不發, 及其極也發之必決, 故曰 “沈潛剛克”.

무릇 만물은 剛한 자가 剛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드러운 자만이 剛할 수 있다. 축적하면서 발휘하지 않다가 극도에 이르러 발휘하면 반드시 흘러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침잠시키는 것이 剛함을 이긴다”고 말한다.

至靜而德方.

夫物圓則好動, 故至靜所以爲方也.

무릇 사물이 둥글면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극히 고요한 것이 방정한 이유가 된다.

後得主而有常, 含萬物而化光. 坤道其順乎. 承天而時行. 積善之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辨之不早辨也. 易曰‘履霜, 堅冰至.’ 蓋言順也.

惟其順也, 故能濟其剛. 如其不順, 則辨之久也.

오직 그것이 순응하기 때문에 剛한 것을 구제할 수 있다. 만약 순응하지 않는다면 상황을 분별하는 일이 늦어질 것이다.

直其正也, 方其義也.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直方大, 不習無不利’, 則不疑其所行也.

小人惟多愧也, 故居則畏, 動則疑. 君子必自敬故內直, 推其直於物故方外. 直在其內, 方在其外, 隱然如名師良友之在吾側也. 是以獨立而不孤, 夫何疑之有?

소인은 오직 부끄러워할 일이 많기 때문에 머물 때는 두려워하고, 움직일 때는 의심한다.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삼가는 까닭에 안을 곧게하고, 그 곧음을 사물에까지 확장시키는 까닭에 밖을 방정하게 한다. 곧음이 안에 있고, 방정함이 밖에 있다면 은연중에 훌륭한 스승과 좋은 법이 내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홀로 서 있어도 외롭지 않으니 어떤 의심이 있겠는가?

陰雖有美, 含之以從王事, 弗敢成也. 地道也, 妻道也, 臣道也. 地道無成而代有終. 天地變化, 草木蕃, 天地閉, 賢人隱. 易曰 ‘括囊, 無咎無譽’, 蓋言謹也.

方其變化, 雖草木猶蕃, 及其閉也, 雖賢人亦隱.

천지가 변화할 때는 초목조차도 번성하지만, 천지가 단절될 때는 賢人조차도 숨는다.

君子黃中通理, 正位居體, 美在其中, 而暢於四支, 發於事業, 美之至也.

黃, 中之色也. 通是理, 然後有是色也. 君子之得位, 如人之有四體, 爲己用也. 有手而不能執, 有足而不能馳, 神不宅其體也.

황색은 중앙의 색이다. 이 이치에 통달한 뒤에야 이 색을 갖게 된다. 군자가 알맞은 지위를 얻는 것은 사람에게 사지가 있어서 자기 뜻대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손이 있으나 잡을 수 없고, 발이 있으나 달릴 수 없다면 정신은 그런 몸에 머물지 않는다.

陰疑於陽必戰. 爲其嫌於無陽也, 故稱龍焉. 猶未離其類也, 故稱血焉. 夫玄黃者, 天地之雜也. 天玄而地黃.”

嫌也, 疑也, 皆似之謂也. 陰盛似陽, 必戰. 方其盛也, 似無陽焉, 故雖陰而稱龍, 然猶未離其陰陽之類也, 故稱血以明其雜. 若陰已變而爲陽, 則無復玄黃之雜也.

嫌과 疑는 모두 ‘비슷하다’는 말이다. 陰이 왕성하여 陽과 비슷해지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 음이 왕성할 때는 마치 거기에 양이 없는 듯하기 때문에 비록 음이지만 ‘龍’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직은 음양의 무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라고 칭하여 음양이 섞여 있음을 밝혔다. 만약 음이 이미 변화해서 양이 되었다면 더이상 검은색과 황색이 섞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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