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모음/동파역전

[동파역전] 1. 건괘(乾卦, ䷀)

베트남10선비 2023. 3. 7.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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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에서 가끔씩 불연듯 떠오를 때마다 정리하고 있는 내용들을 이쪽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는 내릴 예정.

일단 저본은 아래의 책이다.

 

동파역전 (소동파의 주역풀이) | 소식 - 교보문고

동파역전 (소동파의 주역풀이) | 중국 북송 때의 문인으로서 <적벽부>로 유명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 그는 문장 못지 않게 철학적으로도 일거를 이룬 인물이다. 소식(소동파)은 <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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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략적인 원칙

- 해당 책에 나오는 구두점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다. 내 임의대로 바꾼 부분이 있으므로 해당 책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 경 해석 부분은 생략하고, 경의 원전만 남긴다.
- 동파의 전 부분은 책의 저자께서 한 해석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다. 물론 구두점처럼 내 임의대로 바꾼 부분이 꽤 있다.
-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해제와 제요는 생략한다.
- 경에 해당하는 원문은 글씨를 크게. 동파의 전에 해당하는 부분은 글씨를 작게하여 구분한다. 한국어 해석도 글씨 크기를 달리한다.
- 경의 분절은 동파의 주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주석이 없는 부분은 그냥 경만 표시한다.


乾, 元亨利貞. 初九, 潛龍勿用.

乾之所以取于龍者, 以其能飛能潛也. 飛者, 其正也. 不得其正而能潛, 非天下之至健, 其孰能之?

건괘가 용을 취한 까닭은 용이 능히 날 수 있고, 능히 물에 잠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이 용의 올바른 상태이다. 그 올바른 상태를 얻지 못했을 때 잠길 수 있는 것은 천하의 지극히 강건함이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飛者, 龍之正行也; 天者, 龍之正處也. 見而在田, 明其可安而非正也.

나는 것이 용의 올바른 작용이고, 하늘이 용의 올바른 거처이다. (용이) 나타나 밭에 있다는 것은 편안할 수는 있지만 올바른 상태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九三, 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無咎.

九三非龍德歟? 曰否. 進乎龍矣. 此上下之際, 禍福之交, 成敗之決也. 徒曰龍者, 不足以盡之, 故曰君子. 夫初之所以能潛, 二之所以能見, 四之所以能躍, 五之所以能飛, 皆有待於三焉甚矣. 三之難處也. 使三不能處此, 則乾喪其所以爲乾矣. 天下莫大之福, 不測之禍, 皆萃於我而求決焉, 其濟間不容髮. 是以終日乾乾, 至於夕而猶惕然, 雖危而無咎也.

구삼효는 龍德이 아니란 말인가? 龍德이 아니다. 龍德보다 더한 것이다. 이 효는 상하의 사이에 있고, 화복이 엇갈리는 위치이며, 성패가 결정되는 곳이다. 단지 ‘용’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군자’라고 말한 것이다. 무릇 초효가 능히 물에 잠길 수 있고, 이효가 능히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사효가 능히 비약할 수 있고, 오효가 능히 날 수 있는 것은 모두 삼효의 작용에 깊이 의존하는 것이다. 삼효는 어려운 위치이다. 삼효가 만약 이런 상황을 처리할 수 없다면, 건괘는 건괘의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 천하의 막대한 복과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모두 나(구삼효)에게 모여서 결정을 기다리니, 이 상황을 건너고 건너지 못하는 차이는 털끝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종일토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저녁에 이르러서는 두려운 듯이 반성하면 비록 위태하더라도 허물이 없을 것이다.

九四, 或躍在淵, 無咎.

下之上, 上之下, 其爲重剛而不中, 上不在天, 下不在田者, 均也. 而至於九四, 獨躍而不惕者, 何哉? 曰九四旣進而不可復反者也. 退則入於禍, 故敎之躍. 其所以異於五者, 猶有疑而已. 三與四皆禍福雜, 故有以處之, 然後無咎.

하괘의 상효(구삼효)와 상괘의 하효(구사효)는 剛이 중첩되어 있으면서 中을 얻지 못하여 위로는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구사효만이 홀로 도약하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왜인가? 구사효는 이미 나아가서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물러서면 禍에 떨어지므로 도약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효가 오효와 다른 점은 다소 의심하고 있다는 것일 뿐이다. 삼효와 사효는 모두 화와 복이 섞인 까닭에 이 상황을 잘 처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今之飛者昔之潛者也, 而誰非大人歟? 曰見大人者, 皆將有求也, 惟其處安居正, 而後可以求得. 九二者, 龍之安; 九五者, 龍之正也.

지금 하늘을 나는 자는 예전에 은둔했던 자이니 누군들 대인이 되지 못하겠는가? 대인을 만나는 자들은 모두 장차 구하는 것이 있는데, 오직 편안함에 거처하고 올바름에 머문 뒤에야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구이효는 용이 편안한 상태이고, 구오효는 용이 올바른 상태이다.

上九, 亢龍有悔.

夫處此者, 豈無無悔之道哉? 故言有者, 皆非必然者也.

무릇 이 효에 처한 자가 어찌 후회를 없게 하는 道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있다'고 말한 것은 모두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뜻이다.

用九, 見群龍, 無首, 吉.

‘見群龍’, 明六爻皆然也. 蔡墨云, “其姤曰‘潛龍勿用’, 其同人曰‘見龍在田’, 其大有曰‘飛龍在天’, 其夬曰‘亢龍有悔’, 其坤曰‘見群龍無首吉’”. 古之論卦者以不變, 論爻者以變. 姤者, 初九之變也; 同人者, 九二之變也; 大有者, 九五之變也; 夬者, 上九之變也, 各指其一. 而坤則六爻皆變. 吾是以知用九之通六爻也, 用六亦然.

‘여러 용이 나타난다’는 말은 여섯 효가 모두 그렇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채묵이 말하기를 “건괘가 변한 구괘는 ‘물에 잠겨 은둔한 용이니 활동하지 말라’는 뜻이라 했고, 건괘가 변한 동인괘는 ‘나타낸 용이 밭에 있다’는 상태라고 했으며, 건괘가 변한 대유괘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는 상황을 말했고, 건괘가 변한 쾌괘는 ‘높이 올라간 용이니 후회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라 했으며, 건괘가 변한 곤괘는 ‘여러 용이 나타나는데 우두머리가 없으니 길하다’는 상태를 말한다”고 하였다. 옛날에 괘를 논하는 자는 변하지 않는 괘 자체를 가지고 말하였고, 효를 논하는 자는 변하는 효의 위치를 두고 말하였다. 구괘는 건괘의 초구효가 변한 것이고, 동인괘는 건괘의 구이효가 변한 것이며, 대유괘는 건괘의 구오효가 변한 것이고, 쾌괘는 건괘의 상구효가 변한 것이니, 이들은 각각 한 효가 변한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곤괘는 여섯 효가 모두 변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용구가 여섯 효 모두의 변화를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곤괘의) 용육 역시 이러한 이치이다.

彖曰: “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此論元也. 元之爲德, 不可見也, 其可見也, 其可見者, 萬物資始而已. 天之德, 不可勝言也, 惟是爲能統之. 此所以爲元也.

이 부분은 元(만물의 근원)에 대해 논한 것이다. 원의 덕은 볼 수가 없으니, 볼 수 있는 것은 만물이 그것을 바탕으로 시작하는 모습뿐이다. 하늘의 덕은 말로 다할 수 없으니, 오직 乾道만이 하늘을 통솔할 수 있다. 이것이 원이 되는 까닭이다.

雲行雨施, 品物流形.

此所以爲亨也.

이것이 亨(자라고 성장함)이 되는 까닭이다.

大明始終, 六位時成.

此所以爲利也. 生而成之, 乾之終始也. 成物之謂利矣.

이것이 利가 되는 까닭이다.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이루어주는 것이 乾道의 처음과 끝이다. 만물을 이루어주는 것을 일컬어 ‘이로움’이라고 말한다.

時乘六龍, 以御天.

飛潛見躍, 各適其時以用我剛健之德也.

(용이) 하늘을 날고, 물 속에 잠기며, 모습을 나타내고, 하늘로 도약하는 것은 각각 그 알맞은 때를 만나서 나의 강건한 덕을 사용하는 것이다.

乾道變化, 各正性命.

此所以爲貞也.

이것이 貞이 되는 까닭이다.

保合大和, 乃利貞.

通言之也. 貞, 正也. 方畿變化, 各之於情, 無所不至. 反而循之, 各直其性, 以至於命. 此所以爲情也. 世之論性命者, 多矣. 因是, 請試言其粗. 曰. 古之言性者, 如告瞽者. 以其所不職也. 瞽者未嘗有見也. 欲告之以是物, 患其不職也, 則又以一物狀之, 夫以一物狀之, 則又一物也非是物矣. 彼惟無見, 故告之以一物而不職, 又可以多物眩之乎? 古之君子患性之難見也. 故以可見者言性. 夫以可見者言性, 皆性之似也. 君子日修其善以消其不善, 不善者日消, 有不可得而消者焉. 小人日修其不善以消其善, 善者日消, 亦有不可得而消者焉. 夫不可得而消者, 堯舜不能加焉, 桀紂不能亡焉, 是豈非性也哉? 君子之至於是, 用是爲道, 則去聖不遠矣. 雖然有至是者, 有用是者, 則其爲道常二, 猶器之用於手. 不如手之自用, 莫知其所以然而然也. 性至於是, 則謂之命. 命, 令也. 君之令曰命, 天之令曰命, 性之至者亦曰命. 性之至者, 非命也. 無以名之而寄之命也. 死生禍福莫非命者, 雖有聖智, 莫知其所以然而然. 君子之於道, 至於一而不二, 如手之自用, 則亦莫知其所以然而然矣. 此所以寄之命也. 情者, 性之動也. 泝而上至於命, 沿而下至於情, 無非性者. 性之與情, 非有善惡之別也. 方其散而有爲, 則謂之情耳. 命之與性, 非有天人之辨也. 至其一而無我, 則謂之命耳. 其於易也, 卦以言其性, 爻以言其情; 情以爲利, 性以爲貞. 其言也互見之, 故人莫之明也. 易曰, “大哉, 乾乎! 剛健中正, 純粹精也.” 夫剛健中正, 純粹而精者, 此乾之大全也, 卦也. 及其散而有爲, 分裂四出而各有得焉, 則爻也. 故曰, “六爻發揮, 旁通情也.” 以爻爲情, 則卦之爲性也, 明矣.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 乃利貞.” 以各正性命爲貞, 則情之爲利也, 亦明矣. 又曰, “利貞者, 性情也”, 言其變而之乎情, 反而直其性也.

(원형리정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正은 ‘올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乾道가) 변화하여 사물 각각의 실정에 나아가면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다. (사물은) 자신을 돌이켜 각각 자신의 성품을 바로잡으면서 나아가면 命에 이른다. 이것이 貞이 되는 까닭이다. 세상에는 性과 命을 논하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시험삼아 그것에 관해 대충 말해보겠다. 옛날 性에 관해 말하는 자는 소경을 가르치는 사람과도 같았다. 사람들이 성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경이란 일찍이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에게 이 물건에 대해 알려주고자 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다른 물건을 가지고 그 물건을 설명해 준다. 무릇 다른 물건을 가지고 그 물건을 설명하는 것은 다시 하나의 물건을 추가하는 것으로서, 원래의 물건은 아닌 것이다. 그는 참으로 아무 것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물건을 가지고 설명해 주더라도 알지 못한 것인데, 그렇다 해서 또다시 잡다한 것들을 끌어들여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옳은 일이겠는가? 옛날 군자는 (사람들이) 성품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성품에 관해 설명했다. 무릇 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성품에 관해 설명했기 때문에 모두가 성품과 유사한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군자는 날마다 선을 닦아서 불선함을 제거하기 때문에 불선함이 날로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는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소인은 날마다 불선함을 행하여 선함을 제거하기 때문에 선함이 날로 사라지지만, 그 가운데도 역시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무릇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것은 요순 같은 성인이라도 더할 수 없고 걸주 같은 악인이라도 없앨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성품이 아니겠는가? 군자가 이것에 도달하여,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道로 삼는다면 옛 성인과의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에 도달하는 것이 있고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있다면, 항상 두 가지 道가 있게 되니, 손을 가지고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같아진다. 이는 (도구 없이) 손 자체만을 가지고 뜻대로 사용하는 것, (말하자면) 그것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만 못하다. 性이 이런 경지에 도달했다면 그것을 命이라고 부른다. 命은 ‘명령’을 뜻한다. 군주의 명령을 ‘명’이라 하고, 하늘의 명령을 ‘명’이라 하며, 性의 지극함도 역시 ‘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性의 지극함은 사실 命이 아니다. 무엇이라 이름할 것이 없어서 명이라는 말에 의탁했을 뿐이다. 죽거나 살며 재앙을 당하거나 복을 받는 것이 모두 명인 까닭은 비록 聖人의 지혜가 있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는데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군자가 道에 대해서, 손 자체만을 가지고 뜻대로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되어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역시 그것이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命이라는 말에 의탁한 까닭이다. 情은 性이 움직인 것이다.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命에 이르고, 아래로 흘러 내려가면 情에 이르니, 어느 것도 性이 아닌 것이 없다. 性과 情은 선과 악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性이 흩어져 행위함이 있는 것을 情이라 부를 뿐이다. 命과 性은 하늘과 사람으로 분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되어 無我의 경지에 이른 것을 命이라 부를 뿐이다. 이것을 易에 적용시켜 보면, 卦는 性에 대해서 말하고 爻는 情에 대해서 말하니, 情은 利가 되고 性은 貞이 된다. 그 말들이 번갈아 나타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뜻을 밝히지 못한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크도다, 乾道여! 강건하고 中正하며 순수하고 정밀하다”고 하였다. 무릇 강건하고 중정하며 순수하고 정밀한 것은 건도의 완전함을 표현한 것으로, 卦를 말한다. 이것이 흩어져 작위함이 있어서, 사방으로 분열되어 저마다 얻어 가지는 데 이르면, 곧 爻가 된다. 그러므로 “여섯 효가 발동하여 자세하고 간곡하게 情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爻가 情이 된다면 卦가 性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乾道가 변화하여 (사물이) 각각 性과 命을 바르게 한다. (만물의) 위대한 화합을 보호하고 유지하니, 이롭고 올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사물이) 각각 성과 명을 바르게 하는 것이 貞이라면 情이 利가 되는 것 역시 자명한 일이다. 또한 “利貞이란 性과 情이다”라고 하였는데, 乾道가 변화하면 情에 나아가고, 그것을 돌이키면 性을 바르게 한다는 말이다.

首出庶物, 萬國咸寧.”

至於此, 則無爲而物自安矣.

이 경지에 이르면 無爲하더라도 만물이 스스로 편안해진다.

象曰, “天行健, 君子以自彊不息.

夫天豈以剛故能健哉? 以不息故健也. 流水不腐, 用器不蠱. 故君子莊敬日强, 安肆日婾. 强則日長, 婾則日消.

무릇 하늘이 어찌 剛하기 때문에 건실하겠는가? 쉬지 않기 때문에 건실한 것이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사용하는 나무그릇은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가 엄숙하고 공경한 생활을 한다면 날마다 강해질 것이고, 제멋대로 놀아난다면 날마다 구차해질 것이다. 강해짐면 날마다 도가 자라날 것이며, 구차해지면 날마다 도가 사라질 것이다.

‘潛龍勿用’, 陽在下也. ‘見龍在田’, 德施普也. ‘終日乾乾’, 反復道也.

王弼曰, “居上不驕, 在下不憂, 反復皆道也.”

왕필이 말했다. “위에 머물러도 교만하지 않고, 아래에 있어도 근심하지 않는다면, 가고 오는 것이 모두 道일 것이다.”

‘或躍在淵’, 進无咎也. ‘飛龍在天’, 大人造也. ‘亢龍有悔’, 盈不可久也. ‘用九’, 天德 不可爲首也.” 文言曰, “元者, 善之長也; 亨者, 嘉之會也;

陰陽和而物生曰嘉

음양이 화합하여 만물이 생겨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利者, 義之和也; 貞者, 事之幹也. 君子體仁足以長人, 嘉會足以合禮, 利物足以和義, 貞固足以幹事. 君子行此四德者, 故曰‘乾元亨利貞’.

禮非亨則偏滯而不合, 義非利則慘洌而不和.

예의만 있고 형통함이 없다면 한편에 막혀서 합일할 수가 없고,, 의로움만 있고 이로움이 없다면 지나치게 맑아서 화합하지 못한다.

初九曰‘潛龍勿用’, 何謂也? 子曰, ‘龍德而隱者也. 不易乎世,

王弼曰, “不爲世所易.”

왕필이 말했다. “세상의 시류에 따라 뜻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不成乎名, 遯世无悶, 不見是而无悶. 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 潛龍也.’ 九二曰‘見龍在田, 利見大人’, 何謂也? 子曰, ‘龍德而正中者也. 庸言之信, 庸行之謹. 閑邪存其誠, 善世而不伐, 德博而化. 易曰見龍在田, 利見大人, 君德也.’

堯舜之所不能加, 桀紂之所不能亡,是謂誠. 凡可以閑而去者, 無非邪也. 邪者盡去, 則其不可去者,, 自存矣. 是謂‘閑邪存其誠’. 不然, 則言行之信謹, 蓋未足以化也.

요순 같은 성인이란 더할 수 없고 걸주 같은 악인이라도 없앨 수 없는 것, 이것을 誠이라 한다. 무릇 막아서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사악함이 아닌 것이 없다. 사악한 것을 다 제거하면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저절로 보존된다. 이것을 일러 ‘사악함을 물리치고 그 誠을 보존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지 않다면 믿음직한 말과 근면한 행동을 가졌더라도 敎化를 행하기에 부족할 것이다.

九三曰‘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无咎’. 何謂也? 子曰, ‘君子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

修辭者, 行之必可言也. 修辭而不立誠, 雖有業不居矣.

말을 연마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반드시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은 연마하였으나 誠을 세우지 못했다면 비록 하는 일(직업)이 있더라도 그 일(직업)에 계속 머물지는 못한다.

知至至之, 可與幾也. 知終終之, 可與存義也.

至之爲言往也. 終之爲言止也. 乾之進退之決在三, 故可往而往其幾, 可止而止其義.

至는 ’간다‘는 말이다. 終은 ’멈춘다‘는 말이다. 건괘의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三爻에 달려 있으므로 나아갈 만하면 그 기미에 나아가고, 멈출 만하면 그 의로움에 멈추는 것이다.​

是故, 居上位而不驕, 在下位而不憂. 故乾乾, 因其時而惕, 雖危无咎矣.’ 九四曰‘或躍在淵无咎’. 何謂也? 子曰 ‘上下无常, 非爲邪也; 進退无恒, 非離群也. 君子進德修業, 欲及時也. 故无咎’. 九五曰‘飛龍在天, 利見大人’. 何謂也? 子曰 ‘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燥濕不與水火期而水火卽之, 龍虎非有求于風雲而風雲應之. 聖人非有意於物而莫不欲見之.

건조함과 습함은 물과 불을 기다리지 않지만 물과 불이 각각 습한 곳과 건조한 곳으로 나아가고, 용과 호랑이가 바람과 구름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람과 구름은 호랑이와 용에 응한다. 성인은 만물에 뜻을 두지 않지만 만물은 성인을 만나고자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 則各從其類也.’

明龍之在天也.

용은 하늘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上九曰‘亢龍有悔’. 何謂也? 子曰, ‘貴而无位, 高而无民.

王弼曰, “下無陰也.”

왕필이 말했다. “아래에 陰이 없기 때문이다.”

賢人在下位而无輔.

夫賢人者, 下之而後爲用.

(이런 상황에서) 무릇 현인은 스스로를 낮춘 뒤에야 활동할 수 있다.

是以動而有悔也.’ ‘潛龍勿用’, 下也; ‘見龍在田’, 時舍也.

時之所舍, 故得安於田.

머물러 쉬어야 할 때이므로 밭에서 편안함을 얻는 것이다.

‘終日乾乾’, 行事也; ‘或躍在淵’, 自試也; ‘飛龍在天’, 上治也; ‘亢龍有悔’, 窮之災也. 乾元用九, 天下治也.

王弼曰, “夫能全用剛直, 放遠善柔, 非天下至治, 未之能也.”

왕필이 말했다. “무릇 강직함은 온전히 이용하고 선유함을 멀리 내칠 수 있는 것은 천하의 지극한 다스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潛龍勿用’, 陽氣潛藏. ‘見龍在田’, 天下文明.

以言行化物, 故曰文明.

말과 행동으로 만물을 교화하기 때문에 '문명'이라고 말한다.

‘終日乾乾’, 與時偕行. ‘或躍在淵’, 乾道乃革. ‘飛龍在天’, 乃位乎天德. ‘亢龍有悔’, 與時偕極. 乾元用九, 乃見天則.

天以無首爲則.

하늘은 우두머리가 없는 것을 법칙으로 삼는다.

乾元者, 始而亨者也. 利貞者, 性情也. 乾始能以美利利天下, 不言所利, 大矣哉! 大哉, 乾乎! 剛健中正, 純粹精也. 六爻發揮, 旁通情也. 時乘六龍, 以御天也. 雲行雨施, 天下平也. 君子以成德爲行, 日可見之行也.

君子度可成, 則行未嘗無得也, 故其行也, 日有所見, 日可見之行也.

군자가 法度를 이룰 수 있으려면 행위의 결과가 없어서는 안 되는 까닭에 그 행실이 날마다 겉으로 나타나야 하고, 날마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潛之爲言也, 隱而未見, 行而未成. 是以君子弗用也. 君子學以聚之, 問以辨之, 寬以居之, 仁以行之. 易曰‘見龍在田, 利見大人’, 君德也. 九三重剛而不中, 上不在天, 下不在田, 故乾乾, 因其時而惕, 雖危无咎矣. 九四重剛而不中, 上不在天, 下不在田, 中不在人, 故或之. 或之者, 疑之也, 故无咎.

或者, 未必然之辭也. 其躍也, 未可必, 故以或言之, 非以或爲惑也.

‘或(갈까 말까 망설임)’이란 필연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사효의 도약은 필연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이라고 말한 것이니, 이 혹은 미혹된다는 뜻이 아니다.

夫大人者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弗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弗違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 亢之爲言也, 知進而不知退,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 其唯聖人乎? 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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