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 亨利貞. 取女吉. 彖曰, “咸, 感也. 柔上而剛下. 二氣感應, 以相與. 止而說男下女. 是以亨 利貞, 取女吉也.
下之而後得, 必貞者也. 取而得貞, 取者之利也.
아래로 내려간 뒤에 얻는 자는 반드시 곧은 자이다. 곧은 자를 취해서 얻으면 취한 자는 이익이 된다.
天地感而萬物化生, 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 觀其所感, 而天地萬物之情, 可見矣.”
情者, 其誠然也. 雲從龍, 風從虎, 无故而相從者, 豈容有僞哉?
정이란 진실한 모습 그대로를 말한다.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는 것은 이유 없이 서로를 따르는 것이니 어찌 거짓을 용납하겠는가?
象曰, “山上有澤咸. 君子以虛受人.” 初六, 咸其拇. 象曰, “咸其拇, 志在外也.”
外, 四也. 咸其拇者, 以是爲咸也. 咸者以神交. 夫神者將遺其心, 而況於身乎? 身忘而後神存, 心不遺則身不忘, 身不忘則神忘. 故神與身, 非兩存也. 必有一忘, 足不忘屨, 則屨之爲累也, 甚於桎梏. 要不忘帶, 則帶之爲虐也, 甚於縲紲. 人之所以終日躡屨束帶而不知厭者, 以其忘之也. 道之可名言者, 皆非其至, 而咸之可分別者, 皆其粗也. 是故在卦者, 咸之全也; 而在爻者, 咸之粗也, 爻配一體, 自拇而上至於口, 當其處者有其德. 德有優劣而吉凶生焉, 合而用之, 則拇履, 腓行, 心慮, 口言, 六職並舉, 而我不知. 此其爲卦也. 離而觀之, 則拇能履而不能捉, 口能言而不能聽. 此其爲爻也. 方其爲卦也, 見其咸而不見其所以咸. 猶其爲人也. 見其人而不見其體也, 六體各見, 非全人也. 見其所以咸, 非全德也. 是故六爻未有不相應者, 而皆病焉, 不凶則吝, 其善者免於悔而已.
밖이란 사효이다. 그 엄지발가락으로 감응한다는 것은 이것 때문에 함이 된다는 것이다. 함이란 신령함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대개 신령함이란 것은 그 마음도 버려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몸에 대해서는 어ᄄᅠᇂ겠는가? 몸이 잊혀진 뒤에야 신령이 존재하니, 마음을 버려지지 못하면 몸을 잊혀지지 못하고, 옴이 잊혀지지 못하면 신령함은 잊혀진다. 그러므로 신령함과 몸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반드시 하나가 잊혀져야 한다. 발이 신발을 잊지 못하면 신발은 묶는 것이 되어 심하면 족쇄가 된다. 허리가 허리띠를 잊지 못하면 허리띠는 잔학함이 되어 심하면 밧줄과 오라가 된다. 사람이 종일 신을 신고 허리띠를 매도 싫어할 줄 모르는 이유는 이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도는 이름을 붙여 말하는 것은 모두 지극함이 아니고, 함은 구별해서 말하는 것은 모두 조야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괘에 있는 것은 함의 온전한 내용이고, 효에 있는 것은 함의 조야한 내용이다. 효는 한 몸에 각각 배당되어, 엄지발가락에서부터 위로는 입에 이르기까지 그 처한 곳에 해당하는 덕이 있다. 덕에는 우열이 있으니 거기서 길흉이 생긴다. 합해서 쓸 것 같으면 엄지발가락으로 밟고, 장딴지로 가며, 마음으로 헤아리고, 입으로 말해서 여섯 가지의 기능이 함께 하기 때문에 내가 이것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괘가 되는 것이다. 떨어뜨려서 보면 엄지발가락은 능히 땅을 밟을 수 있으나 잡을 수는 없고, 입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들을 수 없다. 이것이 효가 되는 것이다. 괘에서는 감응하는 것을 보고, 감응하는 방법을 보지는 않는다. 마치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사람됨을 볼 뿐 그 사람의 몸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여섯 기관을 따로 본다면 온전한 사람이 아니며, 그 감응하는 방법을 본다면 온전한 덕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이 여섯 효는 서로 호응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모두 병이 든 것이다. 흉하지 않으면 부끄럽고, 선한 자도 고작 후회를 면할 뿐이다.
六二, 咸其腓. 凶. 居吉. 象曰, “雖凶居吉, 順不害也.”
順, 九三也.
순응하는 자는 구삼효이다.
* 저본의 역자께서는 順九三也.로 보고 “구삼효가 순응한다는 말이다”라고 해석을 했다. 첫째로 문리상 구삼효가 순응한다는 게 아니라 구삼효에 순응한다고 번역을 해야 맞다. 둘째로 나는 중국의 표점에 따라서 해석을 했다. 동파가 이 주석을 〈상전〉의 다음에 붙였다는 게 그 이유이다. 〈상전〉의 문구에 順이 등장하는데, 이를 풀었다고 보는 게 맞다. 만약 이걸 조선에서 《주역전의》의 경문을 해석할 때처럼 ‘順면’으로 해석한다면 順을 동사로 보면 되지만, 저본 역자께서 경문을 해석한 방법은 “순응하는 자가 해치지 않는다”로 해석을 하셨다. 나도 여기서는 順을 하나의 명사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九三, 咸其股. 執其隨, 往吝. 象曰, “咸其股, 亦不處也. 志在隨人, 所執下也.”
執, 牽也; 下, 二也. 體靜而神交者, 咸之正也. 艮, 止也, 而所以爲艮者三也. 三之德固欲止, 而初與二莫之聽者, 往從其配也. 見配而動, 雖三亦然. 是故三雖欲止, 而不免於隨也. 附於足, 而足不能禁其動者, 拇也. 附於股, 而股不能已其行者, 腓也. 初與二者艮之體, 而艮不能使之止也. 拇雖動, 足未必聽. 故初之於四, 有志而已. 腓之所之无不隨者, 以動靜之制在焉. 故可以凶, 可以吉也. 股欲止而牽於腓, 三欲止而牽於二, 不信己而信人, 是以往吝也.
집은 끌어당김이고, 아래는 이효이다. 몸체가 고요하며 신령함으로 교류하는 것이 함의 올바름이다. 간은 그침인데, 간이 된 까닭은 삼효이다. 삼효의 덕은 참으로 그치고자 하나 초효와 이효가 들으려 하지 않고 그 짝에게 가서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짝을 보고 움직이는 것은 삼효라 하더라도 또한 그렇게 된다. 이런 까닭에 삼효가 비록 그치고자 하지만 따르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발에 불어 있지만 발이 그 움직임을 금지할 수 없는 것이 엄지발가락이다. 넓적다리에 붙어 있지만 넓적다리가 그 행동을 그치게 할 수 없는 것이 장딴지이다. 초효와 이효는 간의 몸체지만 간은 그것을 그치게 할 수 없다. 엄지발가락이 비록 움직이더라도 발이 반드시 그 말을 듣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초효는 사효에게 뜻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장딴지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동정(動靜)을 제어하는 것이 장딴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흉할 수도 있고, 길할 수도 있다. 넓적다리가 그치고자 하나 장딴지에게 이끌리고, 삼효가 그치고자 하나 이효에게 당겨지듯이 자기를 믿지 못하고 남을 믿는다. 그런 까닭에 나아가면 부끄러운 것이다.
九四,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象曰, “貞吉悔亡. 未感害也. 憧憧往來, 未光大也.”
九四之所居, 心之所在也. 方其爲卦也, 四隱而不見, 心與百體, 並用而不知. 是以无悔无朋. 及其表之以四也, 而心始有所在, 心有所在而物疑矣. 故憧憧往來以求之, 正則吉, 不正則不吉. 既感則悔亡, 未感則害我者也. 其朋則從, 非其朋則不從也.
구사효가 머무는 곳은 마음이 있는 곳이다. 바야흐로 괘가 형성될 때는 사효는 숨어서 보이지 않고, 마음은 몸의 백체(百體)와 함께 작용하지만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후회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러다가 사효가 모습을 나타내면 마음이 비로소 머물 곳을 갖게 되는데, 마음이 머물 곳이 있으면 사물이 의심한다. 그러므로 뜻을 정하지 못하고 왕래하면서 사물을 구하니, 올바르면 길하고, 올바르지 못하면 불길하다. 이미 감응했으면 후회하는 일이 없고, 아직 감응하지 못했으면 나를 해치는 자이다. 그것이 친구라면 따를 것이고, 그것이 친구가 아니라면 따르지 않을 것이다.
九五, 咸其脢. 无悔. 象曰, “咸其脢, 志末也.”
拇之動, 腓之行, 股之隨, 心之憧憧往來, 皆有爲之病也. 懲其病而舉不爲者, 是无爲之病也. 五之所在者脢也, 而脢者體之不動而无事者也. 畏其有事之勞, 而咸於无事求, 无悔而已, 志已卑矣.
엄지발가락의 움직임, 장딴지의 행함(다니는 것), 넓적다리의 따름, 마음이 뜻을 정하지 않아 왕래하는 것 모두 유위(有爲)의 병이다. 그 병을 바로잡았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은 무위(無爲)의 병이다. 오효가 있는 곳은 등인데, 등은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일이 없는 곳이다. 일이 있음의 수고로움을 두려워하여, 일이 없음을 추구하는 데 감응하니 후회가 없을 뿐이나 뜻은 이미 비근하다.
* 저본의 역자께서 하신 표점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畏其有事之勞, 而咸於无事, 求无悔而已, 志已畢矣. "그 유사(일이 있음)의 노고를 두려워하고, 무사(일이 없음)에 감응하여 후회 없음을 구할 뿐이므로 뜻을 이미 마친 것이다."
** 왕필의 주역이든 이후 이정 형제나 주자든 경문에서의 末은 淺末로 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엽에 뜻을 둔다는 것인데, 보통 이를 해석할 때 말을 상육효로 보아 상육효에 뜻을 두고 있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역자께서는 경문의 志末也를 “뜻을 이루었다”라고 번역하였고, 그 이유를 소동파의 주석을 志已畢矣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인본을 아무리 보아도 畢이 아니라 卑자로 보인다.(아래 영인본 사진파일 첨부)
*** 중국 측 표점본에는 无事求를 无事之求라며 영인본에 존재하지 않는 之를 넣었는데, 앞뒤의 대구를 맞추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도, 유위와 무위의 대구, 유사와 무사의 대구, 맥락상 무회를 구한다는 내용이 필요하지 않은 점 등을 감안했을 때 之라는 글자가 없어도 중국 측의 표점처럼 끊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上六, 咸其輔頰舌. 象曰, “咸其輔頰舌, 滕口說也.”
上六之所在者, 口也. 夫有以爲咸者, 口未必不用, 而恃口以爲咸則不可.
상육효가 있는 곳은 입이다. 대개 감응할 수 있는 것은 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입에 의존해서 감응이 된다고 생각하면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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