習坎,
坎, 險也, 水之所行而非水也. 惟水爲能習行於險. 其不直曰坎, 而曰習坎, 取於水也.
감은 ‘험함’이며, 물이 움직이게 하는 바이지, 물 자체가 아니다. 오직 물만이 험한 곳에서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을 곧바로 ‘감(坎)’이라 하지 않고 ‘습감(習坎)’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에서 취한 것이다.
有孚, 維心亨. 行有尙. 彖曰, “習坎重險也, 水流而不盈.”
險故流, 流故不盈.
험난하기 때문에 흐르고, 흐르기 때문에 가득 차지 않는다.
行險而不失其信.
萬物皆有常形, 惟水不然, 因物以爲形而已. 世以有常形者爲信, 而以无常形者爲不信. 然而方者可斲以爲圜, 曲者可矯以爲直, 常形之不可恃以爲信也. 如此今夫水, 雖无常形, 而因物以爲形者, 可以前定也. 是故工取平焉, 君子取法焉. 惟无常形, 是以遇物而无傷, 惟莫之傷也, 故行險而不失其信. 由此觀之, 天下之信, 未有若水者也.
만물은 모두 일정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오직 물만은 그렇지 않아서 사물을 따라서 형상을 지을 뿐이다. 세상에서는 일정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신뢰하고, 일정한 형상이 없는 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난 것도 깎아내면 둥글어질 수 있고, 굽은 것도 바로잡으면 곧아질 수 있으니, 일정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와 같이 지금 물이 비록 일정한 형상은 없지만 사물을 따라서 형상을 취한다는 점은 미리 정해진 것이다. 이 때문에 공인(工人)은 이것으로부터 평평함을 취하고, 군자는 이것으로부터 법을 취한다. 오직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사물을 만나도 다치지 않고, 오직 다치지 않기 때문에 험난한 곳에서 행해도 그 신뢰를 잃지 않는다. 이것으로 볼 때 천하에서 신뢰할 만한 것으로는 물만한 것이 없다.
維心亨, 乃以剛中也.
所遇有難易, 然而未嘗不志於行者, 是水之心也. 物之窒我者, 有盡而是心无已, 則終必勝之. 故水之所以至柔而能勝物者, 維不以力爭而以心通也. 不以力爭, 故柔外. 以心通, 故剛中.
만나는 것들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지만, 행하는 것에 뜻을 두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이 바로 물의 마음이다. 사물이 나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으나 이 마음은 그치지 않으니, 마침내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러므로 물이 지극히 부드럽지만 능히 사물을 이길 수 있는 까닭은 힘으로 싸워서가 아니고 마음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힘으로 다투지 않았으므로 부드러움은 밖에 있다. 마음으로 통했으므로 강함은 가운데 있다.
行有尙, 往有功也.
尙, 配也. 方圜曲直, 所遇必有以配之. 故无所往, 而不有功也.
상(尙)은 짝이다. 모난 것과 둥근 것, 굽은 것과 곧은 것, 어느 것을 만나든 반드시 짝으로 삼을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아가는 바가 없으면 공도 있지 않다.
天險不可升也. 地險山川丘陵也. 王公設險, 以守其國.
朝廷之儀, 上下之分, 雖有彊暴而莫敢犯, 此王公之險也.
조정의 의례와 상하의 신분은 비록 완강하고 포악함이 있지만 감히 범하지 못한다. 이것이 왕공의 험난함이다.
險之時用, 大矣哉!“ 象曰, ”水洊至習坎, 君子以常德行, 習教事.“
事之待教而後能者, 教事也. 君子平居常其德行, 故遇險而不變習爲教事. 故遇險而能應.
일이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 능하게 되는 것이 ‘교사(敎事)’이다. 군자는 평상시에 그 덕행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험난함을 만나더라도 익히는 것을 바꾸지 않고 교사를 한다. 그러므로 험난함을 만나더라도 능히 대응한다.
初六, 習坎入于坎窞. 凶. 象曰, ”習坎入坎, 失道凶也.“
六爻, 皆以險爲心者也. 夫苟以險爲心, 則大者不能容, 小者不能忠, 无適而非寇也. 惟相與同患, 其勢有以相待, 然後相得而不叛, 是故居坎之世. 其人可與同處患, 而不可與同處安. 九二九五 二險之不相下者也, 而六三六四其蔽也. 夫有事於敵, 則蔽者先受其害. 故九二之於六三, 九五之於六四, 皆相與同患者也. 是以相得而不叛, 至於初上, 處內外之極, 最遠於敵而不被其禍, 以爲足以自用而有餘. 是以各挾其險, 以待其上, 初不附二, 上不附五, 故皆有失道之凶焉. 君子之習險, 將以出險也. 習險而入險, 爲寇而已.
여섯 효가 모두 험난함을 마음으로 삼는 자이다. 무릇 참으로 험난함을 마음으로 삼으면 큰 자는 용납할 수 없고, 작은 자는 충성할 수 없어서 어디를 가더라도 도적이 아님이 없다. 오직 서로 우환을 함께할 뿐이다. 그 세력은 서로를 기다린 뒤에야 서로를 얻어 배반하지 않으므로, 감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함께 우환에 처할 수는 있지만 함께 편안함에 처할 수는 없다. 구이효와 구오효의 두 험난함은 서로 낮추지 못하는 자이고, 육삼효와 육사효가 이들을 가린다. 대개 적에게 일이 생기면 적이 먼저 그 피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구이효는 육삼효와, 구오효는 육사효와 우환을 함께 한다. 그런 까닭에 서로를 얻어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초효와 상효의 경우는 안과 밖의 극에 처하여 적에게서 가장 멀기 때문에 그 화를 입지 않으니, 족히 스스로 적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 까닭에 각기 그 험난함을 마음에 품고서 그 위의 것을 기다리지만, 초효는 이효에 붙지 못하고, 상효는 오효에 붙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두 도를 잃어버리는 흉함이 있는 것이다. 군자가 험난함에 익숙해지는 것은 장차 험난함에서 나오려는 것이다. 험난함에 익숙해져서 험난함으로 들어가는 것은 도적이 될 뿐이다.
九二, 坎有險. 求小得. 象曰, ”求小得, 未出中也.“
險, 九五也. 小, 六三也. 九二以險臨五, 五亦以險待之. 欲以求五焉可得哉? 所可得者, 六三而已. 二所以能得三者, 非謂其德足以懷之. 徒以二者, 皆未出於險中, 相待而後全故也.
험난한 것은 구오효이다. 작은 것은 육삼효이다. 구이효는 험난함으로 오효에게 임하고, 오효 역시 험난함으로 그것을 기다린다. 오효를 구하고자 하지만 얻을 수 있겠는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육삼효뿐이다. 이효가 능히 삼효를 얻을 수 있는 까닭은 이효의 덕이 그것을 품기에 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이 둘 모두가 아직은 험난한 가운데서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를 기다린 뒤에 온전해지는 것이다.
六三, 來之坎坎. 險且枕. 入于坎窞, 勿用. 象曰, ”來之坎坎, 終无功也.“
之, 往也. 枕, 所以休息也. 來者坎也, 往者亦坎也. 均之二坎, 來則得主, 往則得敵, 遇險於外 而休息於內也. 故曰‘險且枕.’ 六三知其不足以自用, 用必无功. 故退入于坎, 以附九二, 相與爲固而已.
지(之)는 ‘간다’이다. 침(枕)은 휴식하는 도구이다. 오는 자는 험난하고, 가는 자 또한 험난하다. 두 가지 모두 험난함이지만 오면 주군을 얻고 가면 적을 얻으므로, 밖에서는 험난함을 만나고 안에서는 휴식한다. 그러므로 ‘험난하고 또 휴식한다’고 말한 것이다. 육삼효는 자신이 스스로 작용하기에 부족하며, 작용하면 필시 공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물러나서 험난함에 들어가 구이효에 붙음으로써 서로를 고수할 뿐이다.
六四, 樽酒簋貳用缶. 納約自牖. 終无咎. 象曰, ”樽酒簋貳, 剛柔際也.“
樽酒簋貳用缶, 薄禮也. 納約自牖, 簡陋之至也. 夫同利者不交而歡, 同患者不約而信. 四非五无與爲主, 五非四无與爲蔽. 餽之以薄禮, 行之以簡陋, 而終不相咎者, 四與五之際也.
한 통의 술과 두 그릇의 기장밥을 질그릇에 담아서 사용하는 것은 보잘것없는 예물이다. 창으로부터 검소하게 들이는 것은 단출하고 조악함이 지극한 것이다. 대개 이익을 함께 하는 자는 사귀지 않아도 기뻐하고, 우환을 함께하는 자는 약속하지 않아도 신뢰한다. 사효는 오효가 아니면 함께 주군이 되지 못하고, 오효는 사효가 아니면 함꼐 가릴 것이 없어진다. 보잘것없는 예물을 보내고, 단출하고 조악하게 행하는데도 마침내 서로 허물하지 않는 것은 사효와 오효가 사귀기 때문이다.
九五, 坎不盈. 祗既平. 无咎. 象曰, ”坎不盈, 中未大也.“
祗, 猶言適足也. 九五可謂大矣, 有敵而不敢自大, 故不盈也. 不盈所以納四也. 盈者人去之, 不盈者人輸之. 故不盈適所以使之既平也.
지(祗)는 ‘알맞게 만족하다(適足)’라고 말한 것과 같다. 구오효는 크다고 말할 수 있으나 적이 있어서 감히 스스로 크다고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득 차지 않는다. 사효를 받아들이는 까닭은 가득 차지 않아서이다. 가득 찬 자는 떠나고, 가득 차지 않은 자는 사람이 모여든다. 그러므로 가득차지 않은 것을 채우는 것이 이미 평안하게 마는 방법이다.
上六, 係用徽纆, 寘于叢棘. 三歲不得. 凶. 象曰, ”上六失道凶, 三歲也.“
夫有敵而深自屈以致人者, 敵平則汰矣. 故九五非有德之主也. 无德以致人, 則其所致者, 皆有求於我者也. 上六維无求於五, 故徽纆以係之, 叢棘以固之. 上六之所恃者險爾. 險窮則亡, 故三歲不得凶也.
대개 적이 있어서 스스로 깊이 굴복하여 사람을 부르는 자는 적이 평정되면 사치를 누린다. 그러므로 구오효의 덕이 있는 주군이 아니다. 덕이 없는데 남을 부르면, 오는 자들은 모두가 나에게 구하는 바가 있는 자이다. 상육효는 단지 오효에게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튼튼한 밧줄로 묶고, 많은 가시나무로 굳게 지킨다. 상육효가 믿는 것은 험난함 뿐이다. 험난한 것이 다하면 없어지기 때문에 3년 동안 뜻을 얻지 못하여 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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