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국조 훙브엉' 이야기: 반랑과 훙브엉의 진실을 파헤치다
📆 2025년 '국조 훙브엉 제사일'을 맞이하며

한참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늘 처제들이 하루 종일 축 늘어져 있는 걸 보고서야 깨달았다.
“아, 내일이 공휴일이구나…”
그렇다.
4월 7일, 음력 3월 10일은 바로 🇻🇳 베트남의 '국조 훙브엉 제사일(Ngày Giỗ Tổ Hùng Vương)'이다.
한국에 개천절이 있다면, 베트남에는 이 날이 있다.
🧭 한국의 '단군', 베트남의 '훙브엉'
한국인이라면 ‘역사의 시작’을 단군과 고조선으로 생각하듯,
베트남인들 역시 '훙브엉(Hùng Vương)'과 그가 세운 '반랑(Văn Lang)'을 민족의 시작으로 여긴다.
이러한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자, 조상의 날로 기념되는 것이 바로 ‘훙브엉 제사일’이다.
보통 '훙왕'이라고 많이 쓰는데, 한자로 쓰면 雄王, 베트남어로 쓰면 Hùng Vương이고
우리가 '단군'을 '단임금'이라고 쓰지 않는 것처럼 雄王도 하나의 묶음으로 보고 전부 '훙브엉'이라고 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사용한다.
📜 국조 훙브엉 제사일은 왜 음력 3월 10일?
이 날은 국가가 공인한 공식 공휴일이다.
양력이 기준이 아니라 음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매년 음력 3월 10일이기 때문에 양력으로 치면 매번 날짜가 바뀌는 공휴일이다.
원래 푸토(Phú Thọ)성 일대의 민간에 전승되어 오던 마지막 훙브엉의 제사일을 국가 기념일로 승화를 시켜 축제화한 것인데, 푸토성 일대 각 마을, 지역에서 제사를 지내던 날짜가 달랐다.
이를 음력 3월 10일로 고정한 것은 1917년이다.
- 📍 1917년, 카이딩(Khải Định) 황제, 푸토성 순무 레쭝응옥(Lê Trung Ngọc)의 건의를 수용해 ‘음력 3월 10일’로 공식 제정 → 전국가적으로 기념할 수 있도록.
- 📍 2001년, '국가 의례(quốc lễ)'로 승격
- 📍 2007년, 전국 공휴일 지정
- 📍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푸토 성의 훙 왕조 숭배 의식(Tín ngưỡng thờ cúng Hùng Vương)' 등재
- 💼 노동법에 의거하여 이 날 하루는 휴일이다.
🏯 기념행사와 의례는?
전국적으로 국조 훙브엉 사당에서 축제를 진행하지만, 공식 의례는 푸토성(Phú Thọ) 비엣찌(Việt Trì) 지역에 위치한 ‘훙왕 사원 지구(Khu di tích Đền Hùng)’에서 거행된다.
푸토성 일대는 훙브엉이 세운 반랑이 위치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략 띠엔레[Tiền Lê, 前黎] 왕조 시기부터 이 일대에서 음력 3월 초순에 훙브엉의 사당을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지냈다고 한다.
공식 의례는 대략 다음과 같은
- ⛩ Lễ Rước Kiệu (가마 행진):
- 각 마을이 복식을 갖추고 예물을 들고 제단까지 행진하는 의식
- 🙏 Lễ Dâng Hương (헌향 의식)
- 상부 사원에서 거행
- 🎭 전통 문화 행사: 씨름, 줄다리기, 전통 민요 공연인 'Hát xoan' 등등
Lễ Rước Kiệu는 공식 의례의 가장 특징적인 행사이다.
전통적으로 음력 3월 10일에 주변 각 마을에서 산 아래에 함께 모여 훙브엉 사원까지 예물을 들고 올라가는 의식을 거행한 데에서 기인한 행사이다.
현재는 각 마을 단위로 복식을 갖추고, 악기와 사자탈 등을 준비해 대형을 갖춰 행진하며, 향과 꽃과 과일, 바잉쯩(Bánh chưng), 바잉저이(Bánh Giầy), 각 마을에서 생산한 것들을 예물로 준비해 제단으로 행진을 한다.
🤔 이 날은 왜 중요한가?
🔹 베트남인들의 '조상에 대한 감사'를 상징
베트남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Con người có tổ, có tông”
“Uống nước nhớ nguồn”
위와 같이 베트남의 '조상에 대한 감사'를 국가 단위로 표현하는 의례가 바로 이것이다.
🔹 민족 대단결의 정신
훙브엉 숭배에 관한 민간 전승은 푸토성에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전국 단위의 행사가 되면서 베트남 전역의 모든 이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이들임을 잊지 말자는 단결을 표현하는 행사가 되었다.
🔹 유네스코가 인정한 무형문화유산
🧬 반랑과 훙브엉의 계보와 역사성
📜 1. 설화에서 역사로 – 반랑국과 훙브엉의 기록화
훙브엉은 베트남 민족의 시조격 존재로 여겨지며, 그가 세운 ‘반랑(Văn Lang)’국은 베트남 역사상의 최초 국가로 인식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원래 푸토(Phú Thọ) 지방을 중심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설화였으며, 15세기 허우레(Hậu Lê) 왕조 시기 레타잉똥(Lê Thánh Tông, 黎聖宗) 홍득(Hồng Đức, 洪德) 연간에 편찬된 『링남찍꽈이리엣쭈옌(Lĩnh Nam Chích Quái Liệt truyện, 嶺南摭怪列傳/영남척괴열전)』에서 문헌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다이비엣스끼똰트(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大越史記全書/대월사기전서)』에 내용이 삽입되며 정사(正史)로 인정받아 역사적 정통성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 2. 계보와 기원 – 부계와 모계 전승
Lĩnh Nam Chích Quái Liệt truyện의 첫 번째 이야기인 '홍방티쭈옌(Hồng Bàng Thị truyện, 鴻龐氏傳/홍방씨전)' 따르면 훙브엉은 신화적 존재인 락롱꿘(Lạc Long Quân, 貉龍君)과 어우꺼(Âu Cơ, 嫗姬) 사이에서 태어나 어우꺼를 따라 지상에서 살게 된 50명의 아들 중 가장 뛰어난 자(“雄長”)로서, 지상의 나라를 다스릴 자로 선택되었다.
이 내용이 기록된 홍방티쭈옌(Hồng Bàng Thị truyện)에서 '홍방'은 이들 '씨족'의 명칭이다.
- 부계:
- 염제 신농씨의 3세손 데밍(Đế Minh, 帝明) → 부띠엔(Vụ Tiên, 婺仙)의 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 낑즈엉브엉(Kinh Dương Vương, 涇陽王) → 용왕(龍王) 동딩꿘(Động Đình Quân, 洞庭君)의 딸 사이에서 낳은 아들 락롱꿘(Lạc Long Quân)
- 모계:
염제 신농씨의 3세손 데밍(Đế Minh, 帝明) → 아들 데응이(Đế Nghi, 帝宜)→ 데응이의 아들 데라이(Đế Lai, 帝來) → 데라이의 딸 어우꺼(Âu Cơ)
전설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서 태(胎)가 하나 나왔는데, 그 태에서 알 100개가 나오고, 알마다 한 명씩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락롱꿘은 자신이 군장으로 있는 투이푸(Thủy Phủ, 水部)로 50명을 데려갔고, 어우꺼는 나머지 50명과 함께 지상에 남아 퐁쩌우(Phong Châu, 峰州)에 머물며 나라를 세웠다. 그중 뛰어난 자를 임금으로 세워 훙브엉(Hùng Vương)이라 하고[尊其雄長者為主,號曰雄王], 나라 이름을 반랑(Văn Lang)이라 하였다[國號文郎國].
👨🏫 雄長이라는 표현은 보통 '부족' 등에서 '뛰어난 우두머리'를 뜻하는 단어이다. 이것이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에 삽입될 때는 雄이라는 글자를 제거하면서, '맏아들'을 군주로 삼은 것처럼 뜻이 변하게 되었다.
🐉✨ 3. ‘Con Rồng cháu Tiên’ – 민족의 기원 신화
“나는 용의 혈통이고, 너는 신선의 자손이다. …수화는 서로 상극이니, 오래 함께 할 수 없다.”
[我是龍種,水族之長;你是仙種,地上之人。雖陰陽氣合而有子,然水火相克,種類不同,難以久居。]
설화에서 락롱꿘이 언급한 이 문구는 ‘con Rồng cháu Tiên(용의 자손, 신선의 후예)’이라는 베트남 민족 기원의 핵심 신념으로 이어진다.
- Rồng(용) = 락롱꿘의 혈통을 상징 👉 물과 관련된 토템 부족
- Tiên(신선) = 어우꺼의 혈통을 상징 👉 산과 관련된 토템 부족
이는 훙브엉의 뿌리는 서로 다른 토템(용/물 vs 신선/산)을 가진 부족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수부와 육상 부족의 통합 신화를 형성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는 토템적 기원과 자연 숭배 전통을 반영한다.
여기에서 신선으로 대별되는 산 토템은 아마도 '새'일 것으로 추측된다.
우선 ‘반랑(Văn Lang)’이라는 이름 자체가 동남아시아 여러 부족들의 '새🐦'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 여러 부족들의 언어에 등장하는 'Mling, Mlang, Kling, Klang, Bling, Blang' 등의 단어는 전부 '새'를 의미하며 각 부족이 신성시 여기는 큰 새들을 일컫는 것이다.
'Văn Lang'이라는 단어는 이런 류의 발음을 '베트남 발음화'한 것이며, 文郞은 베트남 발음을 한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자닝(Gia Ninh), 메링(Mê Linh)과 같은 명칭도 '새'를 의미하는 단어들의 발음에서 나온 명칭으로 보이며, 어우꺼가 자리를 잡았다는 지역인 Phong Châu에 대해 Lĩnh Nam Chích Quái Liệt truyện에서는 당시 Bạch Hạc(白鶴)현이라는 지명을 가졌다는 점, 이들 씨족의 이름 역시 鴻龐으로 큰 새를 뜻하는 단어라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 4. 군장 호칭으로서의 훙브엉 – 18대 계보
‘훙브엉’은 단일 인물이 아닌 대를 이은 군장의 칭호다. 총 18대의 훙브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사(正史) 상에는 구체적인 계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푸토 등지의 각 훙브엉 사원에는 전해지는 훙브엉응옥파(Hùng Vương Ngọc phả, 䧺王玉譜)와 같은 연원을 알 수 없는 고문헌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고문헌들에는 각 왕들의 구체적인 명칭과 본명, 재위 기간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심지어 아버지 락롱꿘을 따라간 자식들과 어머니 어우꺼를 따라간 자식들의 이름들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인터넷에 보이는 계보는 일본 학자 이와무리 시게미츠(岩村成允)가 『안남통사(安南通史)』에서 구체화한 것이다.
이 계보는 낑즈엉브엉을 1대, 락롱꿘을 2대로 보고 이후 훙브엉의 이름을 가진 왕은 16대가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 베트남 학자 Biệt Lam Trần Huy Bá 등은 이 18대의 왕이 실제로는 18개의 지파, 씨족, 왕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들이 현지의 오랜 전승과 고문헌 등을 연구한 결과 18개의 지파로 표현한 문헌 등을 찾았으며, 18개의 지파로 해석하게 되면 재위 기간이 200~300년이 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각 지파는 팔괘(八卦)와 십간(十干)을 따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는 고고학 성과를 수용해 각 지파 계보를 당시 청동기~철기 문화와 연결되는 물질문화의 계보와 연결하여 분석하고 있다.
아래는 그 표이다.
🧭 5. 고고학과 연계된 18 지파 계보
왕명 | 지파 [支, Chi] | 고고학적 문화 계통 |
涇陽王 [Kinh Dương Vương] | 乾支[chi Càn] | ? |
駱龍君/雄賢王 [Lạc Long Quân/Hùng Hiền Vương] | 坎支[chi Khảm] | |
雄麟王/雄國王 [Hùng Lân Vương/Hùng Quốc Vương] | 艮支[chi Cấn] | |
雄曄王 [Hùng Diệp Vương] | 震支[chi Chấn] | |
雄犧王 [Hùng Hi Vương] | 巽支[chi Tốn] | Văn hóa Phùng Nguyên (초기 청동기) |
雄暉王 [Hùng Huy Vương] | 離支[chi Ly] | |
雄昭王 [Hùng Chiêu Vương] | 坤支[chi Khôn] | |
雄暐王 [Hùng Vĩ Vương] | 兌支[chi Đoài] | Văn hóa Đồng Đậu (중기 청동기) |
雄定王 [Hùng Định Vương] | 甲支[chi Giáp] | |
雄曦王 [Hùng Hi Vương] | 乙支[chi Ất] | |
雄楨王 [Hùng Trinh Vương] | 丙支[chi Bính] | |
雄武王 [Hùng Vũ Vương] | 丁支[chi Đinh] | Văn hóa Gò Mun (후기 청동기) |
雄越王 [Hùng Việt Vương] | 戊支[chi Mậu] | |
雄英王 [Hùng Anh Vương] | 己支[chi Kỷ] | |
雄朝王 [Hùng Triêu Vương] | 庚支[chi Canh] | Văn hóa Đông Sơn (철기) |
雄造王 [Hùng Tạo Vương] | 辛支[chi Tân] | |
雄毅王 [Hùng Nghị Vương] | 壬支[chi Nhâm] | |
雄睿王 [Hùng Duệ Vương] | 癸支[chi Quý] |
📌 총 2622년간 존속되었다는 기록은 『大越史記全書』 기년에 기반함.
- 반랑이 안즈엉브엉 툭판(An Dương Vương Thục Phán, 安陽王 蜀泮)에 의해 멸망한 시점 = 주나라 난왕(Chu Noãn Vương, 周 赧王) 57년 계묘년
- 기년(紀年) → 낑즈엉브엉 1년 임술년~툭판에 의한 멸망 시점 계묘년까지 약 2000년
- 이를 역산하여 멸망 시점에서 약 2000년이 지난 임술년 → 기원전 2879년으로 보는 것
🗺️ 6. 반랑의 영토와 15부 구성
반랑의 영토는
- 🧭 동(東)으로 남해(南海)군
- 🧭 서(西)로는 파(巴)와 촉(蜀)
- 🧭 북(北)으로는 동정호(洞庭湖)
- 🧭 남(南)으로는 호손정국(狐猻精國, 참파 지역)
을 접했다고 전한다.
또한『Lĩnh Nam Chích Quái Liệt truyện』과 『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 『Việt Sử lược(越史略)』에는 반랑국이 15개 부(部)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이름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나, 공통적으로 지리적·문화적 중심부를 드러낸다.
<반랑 15부 명칭>
嶺南摭怪列傳 | 大越史記全書 | 越史略 |
越裳(Việt Thường) | 越裳(Việt Thường) | 越裳氏(Việt Thường Thị) |
交趾(Giao Chỉ) | 交趾(Giao Chỉ) | 交趾(Giao Chỉ) |
文郎(Văn Lang) | 文郎(Văn Lang) | 文郎(Văn Lang) |
武寧(Vũ Ninh) | 武寧(Vũ Ninh) | 武寧(Vũ Ninh) |
九真(Cửu Chân) | 九真(Cửu Chân) | 九真(Cửu Chân) |
寧海(Ninh Hải) | 寧海(Ninh Hải) | 寧海(Ninh Hải) |
懷驩(Hoài Hoan) | 懷驩(Hoài Hoan) | 懷驩(Hoài Hoan) |
陸海(Lục Hải) | 陸海(Lục Hải) | 陸海(Lục Hải) |
陽泉(Dương Tuyền) | 陽泉(Dương Tuyền) | 湯泉(Thang Tuyền) |
福祿(Phúc Lộc) | 福祿(Phúc Lộc) | 嘉寧(Gia Ninh) |
朱鳶(Chu Diên) | 朱鳶(Chu Diên) | 新昌(Tân Xương) |
象郡(Tượng Quận) | 九德(Cửu Đức) | 九德(Cửu Đức) |
真定(Chân Định) | 武定(Vũ Định) | 軍寧(Quân Ninh) |
日南(Nhật Nam) | 新興(Tân Hưng) | 日南(Nhật Nam) |
桂林(Quế Lâm) | 平文(Bình Văn) | 平文(Bình Văn) |
(공통된 명칭과 상이한 명칭으로 랜덤 정렬)
🖍 어우꺼가 자식들과 머물렀던 지역 峰州(Phong Châu) → 15세기 당시 지명으로 白鶴縣(Huyện Bạch Hạch)
🖍 이 지역은 Xứ Đoài라 부르던 지역으로, 지금의 Phú Thọ 일부와 Vĩnh Phúc, Tuyên Quang 남부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
🤔 어우꺼(Âu Cơ)는 딸인가? 부인인가?
: 嶺南摭怪列傳 및 베트남 건국 신화 해석의 쟁점
흥미로운 논쟁도 존재한다.
어우꺼가 데라이의 딸인지, 부인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이 논쟁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먼저 Lĩnh Nam Chích Quái Liệt truyện 저자에 대한 논의부터 먼저 언급하려 한다.
1️⃣ 저자 문제: Trần Thế Pháp을 둘러싼 논의
『Lĩnh Nam Chích Quái Liệt truyện』은 베트남의 고대 전설과 민간 전승을 모아 엮은 대표적인 고전이다. 하지만 이를 엮어낸 저자에 대해서는 오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문헌은 허우레(後黎, Hậu Lê) 왕조 홍덕(Hồng Đức) 연간에 Vũ Quỳnh(武瓊), Kiều Phú(喬富) 등의 문인들이 편집·교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문에서 저자가 누구인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괴력난신(怪力亂神)’에 관한 이야기를 수집한 문헌이라는 성격상, 익명을 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정확한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늘날 베트남 학계는 대체로 Trần Thế Pháp(陳世法)을 저자로 보고 있다. 이 인물은 생몰년조차 명확하지 않지만, 고전 『Kiến văn tiểu lục(見聞小錄)』을 쓴 Lê Quý Đôn이 Trần Thế Pháp이 설화들을 모아 엮었다고 전한 기록을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Lĩnh Nam Chích Quái Liệt truyện』 의 대표적인 번역자인 Lê Hữu Mục 역시 Lê Quý Đôn의 언급을 신뢰할 만한 판단으로 간주하며, “특별한 반증이 없는 한 Trần Thế Pháp을 저자로 간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2️⃣ Âu Cơ의 정체는 딸인가? 첩인가?
“1960년, 두 개의 판본이 낳은 해석의 분기점”
훙브엉의 모친으로 등장하는 인물인 Âu Cơ는, 건국 신화의 중심 인물이자 베트남인의 기원 상징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존재한다.
- Âu Cơ는 Đế Lai의 딸이다.
- Âu Cơ는 Đế Lai의 첩(부인)이다.
이 논쟁은 바로 1960년 출판된 두 종류의 『영남척괴열전』 번역본에서 비롯되었다.

📘 북베트남 번역본 (Đinh Gia Khánh 외, 1960, 하노이 발간)
- 저본: 하노이 사회과학도서관 소장 판본
- Âu Cơ는 ‘Đế Lai의 사랑스러운 딸(愛女)’로 명기됨
- 문장: 帝留愛女嫗姬

👉 이 판본은 전통적인 고전 한문 문법(愛女/ái nữ는 '아끼는 딸'이라는 고정된 문구, 女는 기본적으로 '딸'로 해석하며 같은 글에 이미 娶洞庭君女라는 표현이 있음)에 충실하며, 이에 Âu Cơ를 ‘딸’로 간주한다. 이는 베트남 정설로 이어진 해석이다.
👉 이 해석에 따르면, 원족(遠族)의 '근친혼'이라는 해석이 된다.
📙 남베트남 번역본 (Lê Hữu Mục, 1960, 사이공 발간)
- 저본: 특이한 저본 사용 → Phạm Quỳnh이 필경사를 통해 필사한 사본
- Phạm Quỳnh 필사를 지시함에 있어 자신이 의심하는 부분은 고쳐 쓸 것을 지시했다고 함
- 여기에서 Âu Cơ는 ‘사랑하는 부인(愛妻, Ái thê)’로 번역됨
👉 이 판본은 Âu Cơ를 데라이의 부인으로 해석하여, 락롱꿘이 타인의 아내를 데리고 도망친 구조로 설정한다. 이는 ‘약탈혼’적 해석이다.

🔍 Phạm Quỳnh본의 수정 이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Phạm Quỳnh이 일부 필사 지시를 내린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 단순 오기 가능성: 거의 배제됨. 여타 판본에 명확히 ‘女(딸)’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
- 사용한 저본 자체에 ‘부인’이라는 기술이 있었을 가능성: '부인'으로 전승되는 판본이 있었을 가능성.
- 의도적 개작: 서사의 흐름에 맞춰 데라이의 딸보다는 데라이의 부인으로 설정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판단했을 수 있음. 실제로 어우꺼를 데려가는 과정에서 혼인 절차가 생략되어 있으며 락롱꿘이 데라이를 피해 숨고, 어우꺼를 찾기 위해 쫓아오는 데라이의 신하들을 쫓아내는 과정 등이 있기 때문.
🧠 현대 학계의 해석과 쟁점 정리
현재는 ‘딸’ 해석이 정설로 굳어졌으며, 남베트남에서 주류였던 ‘첩 해석’은 학계에서 다소 배제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베트남사 연구자 Keith Weller Taylor는 Ngô Sĩ Liên이 『 大越史記全書 』 편찬 시에 유교적 도덕 규범을 고려하여 “남의 아내를 빼앗은 구조”를 피하기 위해 ‘처’에서 ‘딸’로 개작한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들이 있다.
- 이미 전통 판본에서 일관되게 ‘딸’로 서술
- 다른 문헌에서도 ‘딸’로 명시된 시가 존재
예: Đặng Minh Khiêm의 『 Thoát Hiên vịnh sử thi tập(脫軒詠史詩集)』에서 락롱꿘에 대해 읊은 시
堂堂世繫出經陽,
帝女來嬪定決祥。
乾始坤生開越祖,
百男自續慶繁昌。 - Ngô Sĩ Liên의 사론(史論)에서는 通鑑外紀를 인용하여 '帝來,帝宜之子。據此所載,涇陽王,帝宜之弟,乃相為婚姻,蓋也尚鴻荒,禮樂未著而然者歟。' 라고 언급을 한 바 있음. 유교적 도덕규범을 고려해 개작을 감행했다면, 일종의 '족내혼' 내용을 서술하고 이를 '예악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언급할 이유가 없음
👉 즉, 단순히 유교 규범 회피 차원의 ‘개작’이라 보기에는 사료 전체의 구조적 일관성과 다른 기록들의 교차 검증에서 무리가 따른다.
📚 중국 사서에도 등장하는 '훙브엉'의 흔적
《사기(史記)》의 삼가주(三家注) 중 하나인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 《구당서(舊唐書)》, 《태평광기(太平廣記)》 등 중국 고대 자료들에도 베트남의 전설처럼 구체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반랑과 훙브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래는 그 내용을 참고용으로 몇 가지만 단순 복붙-해놓은 것이다.
史記 , 南越列傳
高后時,有司請禁南越關市鐵器。佗曰:「高帝立我,通使物,今高后聽讒臣,別異蠻夷,隔絕器物,此必長沙王計也,欲倚中國,擊滅南越而幷王之,自為功也。」於是佗乃自尊號為南越武帝,發兵攻長沙邊邑,敗數縣而去焉。高后遣將軍隆慮侯灶往擊之。會暑溼,士卒大疫,兵不能踰嶺。歲餘,高后崩,卽罷兵。佗因此以兵威邊,財物賂遺閩越、西甌、駱,役屬焉,東西萬餘里。迺乘黃屋左纛,稱制,與中國侔。
- 駱에 대한 注
《集解》:《漢書音義》曰:「駱越也。」 《索隱》:鄒氏云「又有駱越」。姚氏案:廣州記云「交趾有駱田,仰潮水上下,人食其田,名為『駱人』。有駱王、駱侯。諸縣自名為『駱將』,銅印靑綬,卽今之令長也。後蜀王子將兵討駱侯,自稱為安陽王,治封溪縣。後南越王尉他攻破安陽王,令二使典主交阯、九眞二郡人」。尋此駱卽甌駱也。
👉 이에 따르면 이 지역 군장의 이름은 락브엉(Lạc Vương, 駱王)이 된다.
舊唐書地理志
安南都督府
《南越志》:交趾之地,最為膏腴。舊有君長曰雄王,其佐曰雄侯。後蜀王將兵三萬討雄王,滅之。蜀以其子為安陽王,治交趾。
太平廣記 蠻夷三
交趾之地,頗為膏腴,從民居之,始知播植。厥土惟黑壤,厥氣慘雄,故今稱其田為雄田,其民為雄民。有君長,亦曰雄王;有輔佐焉,亦曰雄侯。分其地以為雄將。〈(出《南越志》)
📢 마무리
베트남의 국조 훙브엉 제사일은
단지 전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도 베트남인의 정체성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이다.
🔍 그렇기에 훙브엉과 반랑에 대햐 약간이나마 이해하고 나면,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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