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9일 오전, 또 럼 베트남공산당 총비서가 평양을 찾아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고, 11일 오전 하노이로 복귀했다. 올해는 베트남–북한 수교 75주년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의전과 기념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당(黨) 대표가 직접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가 메시지다.
📍 동선과 의전, 그리고 문서
- 9일 오전: 하노이 출발 → 평양 도착, 김정은 주재 환영식(예포 21발·사열).
- 정상회담: 관계 ‘격상’ 의지 확인, 다층적 대표단 교류·베트남의 개혁(도이머이) 경험 공유 등 실무 협력 강조.
- ‘5축 협력’ 문서(서명은 10일)
- 외교부 간 협정
- 국방부 LOI(국방협력 의향서)
- 통신사 협정(베트남통신사–조선중앙통신)
- 보건부 MOU(의과학·의료)
- 상공회의소 MOU

- 부대 일정
- 9일 밤 예술공연
- 10일 주북 베트남대사관 호찌밍 동상 제막 / 금수산태양궁전 헌화 / 만경대 방문 / 경상 유치원(‘호찌밍’ 교실) 시찰·선물 전달
- 10일 밤: 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 참석
- 11일: 국빈 일정 마무리, 귀국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5/10/11/VBIUB4MZZVG5XPFQPZYLCXBYGE/
평양에 호찌민 반신상... 서울·평양 베트남대사관에 잇따라 건립
평양에 호찌민 반신상... 서울·평양 베트남대사관에 잇따라 건립
www.chosun.com
서울 주재 베트남대사관에 호찌밍 반신상을 건립한 데 이어 평양에도 건립을 했다.

금수산태양궁전에 직접 헌화를 진행했다.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를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있다.
🟥 ‘총비서’가 움직였다는 뜻
또 럼은 국가원수가 아니라 당 수장이다. 사회주의 체제 특성상 당–국가가 혼융돼 있으나, 외교 문법에서 국가 대 국가의 상대는 원칙적으로 국가주석(Chủ tịch nước) 혹은 정부수상(Thủ tướng chính phủ) 이다. 그런데 총비서가 전면에 섰다? 이는 곧 “당 대 당”(Party-to-Party) 채널을 통해 체제·이념 연대를 상징하고,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 전하는 방식이다.
- 한국 기사들이 흔히 말하는 “베트남 권력 1위의 방북”은 사회주의 내부 서열론에서는 맞다.
- 하지만 대외 외교 문법에선 국가가 전면에 서는 것이 상식이다.
- 그럼에도 총비서가 나선 건, 이번 건의 본질이 정권–정권 혹은 당–당의 상징적 결속에 있다는 방증.
이 관점에서 보면 또 럼의 방한(이재명 정부 출범 후 첫 국빈) 또한 당의 이름으로 한국을 탐색’한 전조처럼 보인다. 한국은 국가 채널을 내세우는데, 베트남이 당 채널로 응수한 비대칭. 그 문법 충돌 자체가 메시지다.
내가 처음 또 럼 총비서의 방한 때 눈을 세모로 뜨고 본 이유가 이것이다. 이제 한국은 공산당의 이름을 내걸고 상대를 해도 된다는 판단이 선 건가... 뭐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 과거 총비서들의 한반도 방문과 ‘의미’
🇰🇷 총비서의 한국 방문
베트남공산당 총비서의 한국 방문은 또 럼 총비서가 처음이 아니다.
- Đỗ Mười(도 므어이), 1995년 4월: 도이머이(Đổi mới) 총지휘 + 한·미 수교의 설계자급 인물. '적대국'과의 수교 초기 “당의 보증”이 필요했기에 움직인 것이다.
- Nguyễn Phú Trọng(응우옌 푸 쫑), 2014년 10월: 공동선언문에 북핵 우려·안보리 결의 준수·6자회담 약속 이행·한국의 평화통일 구상 지지 등 민감한 문구가 담겼고, 베트남은 이를 ‘당의 입장’으로 재확인했다. 한국은 베트남 동해(남중국해) 사안에서 베트남 입장을 문서에 반영.
- → 그때의 총비서 방한은 당 차원에서의 상호 보증이었다.
그런데 이번 또 럼의 한국 방한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맥을 알 수가 없다.
🇰🇵총비서의 북한 방문
그리고 이어지는 북한 방문. 한반도에 ‘당’의 외교가 들어 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또 럼 총비서 바로 이전의 총비서 북한 방문은 2007년 Nông Đức Mạnh(농 득 마잉)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방문은, 총비서보다 급이 높은 '당 주석(Chủ tịch Đảng)'의 방문이다. 바로 1957년 호찌밍 주석의 방북.
이 방문은 1958년 김일성의 북베트남 답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총비서는 이번 방북을 통해 베트남 역사의 상징적인 그림을 되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 ‘포괄적 전략 동반자’의 허상
최근의 한국은 베트남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일종의 '착각'을 하고 있다.
교역량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라는 관계 네이밍.
한국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Đối tác chiến lược toàn diện)”라는 라벨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국제 통일 정의도 없고 베트남 내부에서도 정식 정의가 모호하다. 베트남이 러시아·중국 등 가까운 핵심국에 쓰던 표현을 확장 운용해온 측면이 크다. 한국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선언 이후, 지속적으로 여러 나라와 관계 선언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각자 나름대로 해석을 할 정도였다.
실제 운용을 보면, 베트남은 이러한 라벨을 걸고 “우리가 이런 사이니, 우리에게 이 정도 해 달라”는 레버리지 카드로 쓰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뉴질랜드와의 사례에서 보듯, 현장에서 ‘가치·규범’ 충돌이 생기면, 라벨과 무관하게 자국 이익 최우선으로 급선회한다.
오히려 베트남에서 '진짜배기 관계'는 별다른 수식어가 없다.
🩸 ‘피로 맺은 관계’ – 북·베의 오래된 뿌리
북–베 관계는 단순한 이념 동지가 아니다. 전쟁의 상호 지원이라는 '피의 기억'이 깔려 있다.
이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올린 바 있다. 👉 https://blog.naver.com/grioom00/223769283224
이번 월남전 참전용사 모자 입국 거부 및 3천 달러 벌금 사태를 보고 나서...
좀 장문의 글이 될 듯하다. 아침에 뉴스를 보고, 또 페북에서 시끌시끌해서 모를 수가 없었는데 아직 감기...
blog.naver.com
그대로 리플레이를 하는 건 그렇고, 짤막하게 재언급해보려 한다.
응우옌 썬(Nguyễn Sơn) – ‘양국 장군’의 상징
중국 혁명에도 관여했던 베트남 군사지도자이다. 중국에서도 장성 계급을 달아 ‘양국 장군’이라 불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45년 귀국 후 베트남의 독립전쟁을 이끌다가 1950년 다시 중국행.
그의 중국행은 굉장히 의외인 시점이고, 심지어 베트남 내부의 자료들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몇몇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6·25전쟁 개입 국면에서 중–북–베의 협력 축이 형성될 때, 중국군 조직 내에서 역할을 맡았다. 특히, 총군사훈련부 소속으로. 바로 북베트남 인사들의 파견·지휘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비록 병으로 인해 불발되었지만 '북조선 파견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있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전 포스팅을 쓴 이후에 접한 자료에 따르면 북베트남과 중국 양국 정부의 합의로 파견이 된 것이라고 한다.
6·25 지원 – ‘간접·직접의 경계’
- 공식 파병은 아니었으나, 중국 루트를 통한 간접 개입 정황 다수.
- 중국군 편제로 참전한 북베트남 인사가 존재했고, 전쟁 직전 중국에서 훈련받던 북베 인사 3천+ 추정.
- 휴전 이후 북한에서 북베트남으로 귀환한 인사들 다수가 중국 및 북한에서 받은 훈장을 패용. 당시 제네바 협정 관련 국제위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훈장 패용 금지령.
- 호찌밍은 “우리의 만분의 승리를 한국 전선의 국제적 동지를 지원하는 데 쓰자”고 공언.
- 1950년 베트남의 대프랑스 승리는 프랑스의 한국 파병 계획을 제약했다.
- 또한 미국 역시 한반도에 발이 묶이며 즉각적 베트남 개입 여력을 줄였다. ‘상호 우회 지원’ 효과였다.
- 전쟁 중 정치·외교 지원과 대내 여론 결속도 적극적이었다.
→ 이 기억은 베트남전에서 북한의 조종사·심리전 요원 등의 인력 파견과 물자 지원으로 되돌아왔다.
상호 방문의 축적
- 1951 베트남노동당 중앙위원회 대표단의 한 달간 북한 방문
- 호찌밍 주석의 지시에 의한 방문.
- 북베트남-중국-북한 우호 관계 강화 및 북한과 중국 인민의 경험을 배우기 위한 목적.
- 청년, 농민, 노동자, 여성단체와 좌담회
- 평양 시내 공장 시찰 및 문화 기관, 농장, 학교 방문
- 북한 병기창에서 제작된 기관단총 1정을 선물 → 호찌밍 주석에게 전달하며 '베트남-중국-조선 형제들이 함께 싸워 이긴 우의의 상징'이라 설명. 호찌밍 주석도 깊이 감동.
- 38선 방문, 시찰. (351고지 전투의 무대인 월비산 방문)
- 북한 인민군 사단 및 중국 지원군단 방문·면담

- 1957 호찌밍의 평양 방문, 1958 김일성의 하노이 답방으로 이어짐.
- 전 북한주재 베트남대사의 증언에 따르면 1964·1965에도 양측 고위급이 비공식 왕래(김일성의 북베트남 방문 및 레주언 총비서의 북한 답방), 베트남전 준비 차원의 협의라 전함.
이런 역사적 축적이, 이번 당 대 당 재결속의 배경이다. “아주 오래된 그림자”가 다시 드러난 부활한 것이다.
🧮 ‘중립’이라는 보험? — 문서 형식이 말하는 것
그런데 문서 형식이 미묘하다. 베트남이 항상 외연에 두른 '중립'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체결·교환된 5개 문서 중 외교·언론·보건·경제는 Thỏa thuận hợp tác(MOU), 국방은 Ý định thư(LOI)다. 법적 구속력을 피하며 정치 신호만 던진 구조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 특유의 가변성(상황에 따라 속도 조절, 필요하면 철회)을 담보한다.
법적 구속 대신 정치 신호를 우선시한 셈이다. 여차하면 철회 가능성을 열어두고, 유리하면 속도를 붙이는 전형적 베트남식 ‘가변성’.
- 외부 시선 가리기? : 형식은 MOU, LOI지만 실제는 구속력이 있는 무엇이다 → 가능하다.
- 실제 MOU, LOI이며, 정세 판단 후 가속/제동? → 더 확실하다.
- → 다만 그 ‘가변성’이 이미 노출한 스탠스(쿠바 지원, 중국과 경제 협력, BRICS 확대 정상회의, 북한 열병식 등)를 덮을 만큼 세게 작동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 정리 – ‘당 외교’의 복귀, 그 함의를 읽어라
결론적으로, 이번 방북은 베트남 ‘당 외교’의 재부상을 보여줬다.
국가 채널에 안착하지 않은 메시지는, 이념·체제 연대의 언어로 다시 번역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은 라벨의 달콤함이 아니라, 사회주의국가의 문법 차이와 실제 신호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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