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보다 소중한 것들을 향해 – 30년 롯데 자이언츠 팬의 마지막 인사
아무리 1도 도움 안 되는 개쩌리 팬이었지만
거의 30년을 정을 주고 응원을 했던 팀이다 보니...
주절주절대며 온갖 티를 내면서 떠나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블로그를 켰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이별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보게 된 롯데 자이언츠 경기.
지금도 할아버지와의 추억 대부분은
TV 앞에 앉아 함께 야구를 보거나, 할아버지 일을 도와드리며 라디오로 중계를 듣던 기억이다.
그렇게 롯데 경기를 보기 시작 지도, 어느덧 30년이 다 되었다.
👴 할아버지의 구덕, 멀어진 고향의 편린
나에겐 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딱 한 장면 존재한다.
네 살인가 다섯 살 때,
할아버지와 두 분이서 나란히 앉아 롯데 경기를 보던 뒷모습.
그 정도로 할아버지는 열광적인 롯데 팬이셨다.
할아버지는 한센병 환자셨다.
정든 고향마을, 지금의 부산 동대신동, 서대신동 일대에서 쫓기듯 떠나셨고,
그런 할아버지께 구덕야구장은 돌아갈 수 없었던 고향의 상징이 되었다.
운동엔 관심 없으셨던 분이
오직 롯데 경기만큼은,
라디오로, TV로 한 경기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셨다.
고향에 대한 향수, 더이상 닿을 수 없는 마음의 거리.
그래서 야구가, 롯데가 곧 '그리움'이었다.
🧒 어린 나는 그냥, 할아버지 곁이 좋았다
야구 규칙도 제대로 몰랐던 아이였지만
할아버지 옆에서 경기를 함께 보는 그 시간이 좋았다.
타율 같은 기본 지표도 모르고, 투수들이 던지는 구종 같은 것도 잘 몰랐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이름만은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자리 잡았다.
⚾ 암흑기, 그리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시즌
시간은 흘렀고,
우리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던 그때,
할아버지의 건강도 급격히 나빠지셨다.
그리고 하필 롯데의 초암흑기, 이른바 '비밀번호 시절'도 겹쳐 있었다.
2년 연속 꼴찌까지는 웃으며 넘기셨지만,
3년 연속 꼴찌가 보이던 어느 날부턴,
야구조차 괴로움이 되었다.
"꼬발이 롯데..."
할아버지께서 어느 순간부터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
이후 말기 직장암으로 정신이 흐릿해진 상태에서도
롯데 경기가 켜져 있는 TV 앞에서
멍하니 경기를 바라보셨다.
그게 할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야구 기억이다.
신나게 두들겨 맞는 롯데를 보시다가,
다시 조용히 다시 잠에 드셨던 그 모습.
그렇게 4년 연속 꼴지 확정을 보신 그 해 연말에 눈을 감으셨다.
🕯 할아버지 대신 지켜본 약 20년의 시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혼자 남아서 할아버지의 소원을 대신 이뤄주고 싶었다.
롯데가 언젠가 강팀이 되기를,
1위를 하고,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 그 순간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하셨던 그 바람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으며 야구를 봤다.
하지만 근처 비슷한 지점까지 갔던 순간은 있었어도
정작 우승의 순간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매년 같은 실망.
같은 패배.
같은 핑계.
마치 저주처럼 남은 응원의 관성.
롯데를 왜 응원하냐며 비아냥대던 타팀팬 대학 동기들의 비웃음도 받으며 꿋꿋하게 버텨온 지난 날들.
그리고 이후 혼자서 조용히 야구를 보았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롯데 팬인 걸 알게 되면, 어떻게 그렇게 팬인 게 티가 하나도 안 나냐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어느새 할아버지의 부재도 20년을 넘겼고,
기쁨도 감동도 없는 응원은
감정 소모와 분노만 남기고 있었다.
👨👩👧 이제는 정말, 안녕
6월 5일 키움과의 경기.
결정적이었다.
이제는 이 따위의 경기를 보기 위해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는 게 너무 아깝다.
나보다 돈도 훨씬 잘 벌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올드 팬의 심정에는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 프로 선수들.
매년 이렇게 맥빠지는 경기하고도 달라지는 느낌조차 없는데
나만 왜 이리 혼자 우울해하고, 축 쳐져야 하는 것일까?
야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롯데 자이언츠에 얽힌 내 추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 띠엔이
나한테 '응원하는 팀을 바꾸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하는 말에 뭐라고 할 말도 없고
눈 앞에서 생긋생긋 웃으며 재밌게 놀고 있는 두 살인 딸아이 앞에서
이딴 경기 보면서 짜증을 내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중간에 도망칠 기회는 많았다.
NC 다이노스가 창단했을 때, 손아랫동생처럼 NC로 갈아타든지,
아니면 야구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다른 운동을 좋아하는 아버지나 막내 동생처럼
아예 다른 종목으로 갈아탔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대전에 오랫동안 자리잡으면서 뒤늦게 야구에 관심을 가진 어머니처럼 한화 팬이 되거나.
🫶 할아버지, 이쯤이면… 저 잘했죠?
30년간의 여정이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간절하게 응원했다.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에 먹칠을 했던 그 롯데 자이언츠...
그 최악의 기억을 훌훌 날릴 수 있는 강팀의 모습을 목격하고 싶었다.
이제 더는 힘들다.
그 야구를 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별 관심도 없는데,
홀로 응원을 하고 있는 나 혼자 속이 앓는 모습.
야구에 야금야금 갉아먹히는 내 삶.
이젠 내 주위,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전혀 롯데 자이언츠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새로운 취미,
새로운 관심사,
바로 곁에 있는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찾기 위해 야구를 떠나보려 한다.
할아버지,
이제는 놓아도 되겠죠?
내가 할아버지 대신해서 이쯤 응원했으면, 할아버지께서도 "고생했다"고 해주시지 않을까.